《to my birthday》 전시전경 ©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작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위화의 소설 『인생』 이었다. 소설은 노인이 된 푸구이가 민요를 수집하는 한 젊은이를 만나 온갖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일생을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으로, 중국혁명, 문화대혁명 등 혼란의 중국 근대사를 관통해 살아간 한 개인의 서사를 담는다. 주인공 푸구이의 시점과 소설 속 액자의 역할을 하는 외부 인물(젊은이)의 시점이 결합된 이 소설은 독자들도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액자 속 이야기를 읽으며 외부 인물처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소설의 구조상 화자(푸구이)는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청자(젊은이, 독자)를 향해 여러 장치를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위화는 좀처럼 믿기 힘든 푸구이의 처절한 삶을 차분하고 심상한 말투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나는 장성은의 사진을 접하면서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공허함에 시선이 이끌렸고, 이 공허함을 나의 정서로 확장해 보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당연함으로 치부해 온 일상의 면면을 다시금 검토하고 싶은 마음속의 자극이었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비극적 상황이나 비참함을 보고 내면에 슬픔을 치유하는 카타르시스나, 그 반대에 있는 일상 면면의 아름다움, 찰나의 소중함 따위를 그의 작업과 쉽게 접붙이려는 게 아니다. 그의 사진에는 보는 이와의 역동적인 거래 행위 즉, 반응을 유도하는 작위적 장치가 없다. 주제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심리적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누군가의 시선이 고정되면 상대방에 맞춰, 일종의 받은 메일을 자동으로 라벨링 하는 메일함처럼 신속하게 지정된 곳과 주파수를 달리하며 교감을 시도한다. 즉, 작가는 위화의 창작 방식처럼 정동적 에너지를 발산하여 자신의 내재적 욕망이 발휘될 수 있는 시공간을 형성하는 한편, 작업을 대하는 각 개체들마다 공명을 이룰 수 있는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작가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이 어디에서 연원(淵源)하는지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고, 하물며 이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도 않는다.

“너무 많이 이용되어 너덜너덜해진 저 단어를 보면서 새로운 단어를 찾거나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 하지만, 여전히 전과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합니다. (중략) 저의 작업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지켜보면서 미세한 차이들을 작품화한다고 보면 됩니다.”
(2016년 아마도 미술상 인터뷰 당시)

2008년부터 현재까지의 작업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된 관심사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일상 속에 흩어져 있는 작고 대수롭지 않은 파편적 감정(들)이다. ‘〈스페이스 해밀톤〉 (2010)은 인체뿐 아니라 일상의 친근한 사물까지 포용해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자 하였으며, 공간의 크기를 이야기할 때 새롭고도 시적인 단위를 제시하는 작업이다’(2018년 북서울미술관 《잃어버린 세계》 작가 소개글 중 발췌), ‘혹자는 이 전시의 주제인 고독이라는 단어에 의아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현대 미술이 개념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주제 중 하나가 고독, 죽음, 우울 같은 존재론적 문제들이다. (중략)

그런 점에서 고독을 주제로 끌어낸 장성은은 삶의 문제를 작업으로 풀어내려 한 드문 시도다.’(문혜진, 「고독의 위치」, 『정지는 아무도 보지 못한 거친 짐승이다』, 윌링앤딜링 (2019), 22쪽) 이어서 홍지석 비평가는 ‘장성은의 작업은 형식적인 층위에서 진행되는 긴장, 또는 공간의 탐색보다는 오히려 삶의 층위에서 진행되는 긴장 또는 공간의 탐색에 가깝다. (중략) 머무르며 만나고 관계를 이룬다. 떠난다. 그 속에서 ‘서로’의 정체(停滯)를 만지고 정체(正體)를 만든다. 그때 그 모든 요소들의 절묘한 연산으로, 탄생하는 것.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동시에 준비한다. 그것은 감각이고 감정이며 삶이다.’ 라고 적고 있다. 장성은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일상을 ‘또 다른 추상성으로 그것을 재사유하여 제시’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이처럼 이끌게 했을까?

왜 그렇게 케익(생일)에 집착하세요?

생일은 모든 인간이 갖고/알고 있다. 생(년월)일을 별자리와 사주팔자 등으로 풀어내는 운명 풀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며, 사회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 모두에게 중요도는 다르지만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다. 전시의 이야기가 왜 ‘생일’에서 출발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그가 내게 한 마디를 던진다. “왜 그렇게 케익(생일)에 집착하세요?” 거칠게 말해서 그 문장은 해설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 어떤 긍부정도 없이, ‘그냥’ 말 그대로 사전적 정의로써 콘텍스트 없이 텍스트만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앞서 말한 ‘일상의 어떤 면면을 드러내는 작가의 자세’ 즉,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행위는 작가 내면에서만 반응한 후 사라진다. 이렇듯 작업에서 소거된 작가로 인해 도리어 일종의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그의 사진의 잠재력을 고찰하게 하는 일관된 태도가 여기서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일상의 숨은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현실을 찍지 않는다. 〈Wounded cake〉(2022), 〈Nude apple〉(2022)과 같은 작업은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 사진이지만, 우리의 눈 앞에 놓인 구체적 현실을 더 특별하게 지각하고 표현한다. 작가의 지시에 따른 정확한 연출과 후가공을 거쳐 이 사진들은 환상적인 표면이 된다. 일반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다양한 것(움직임)들이 조합되어 있고, 여러 사진이 중첩되어 시간적 구조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서로 상이한 공존/병치/치환을 일삼는 작업 속 평범한 오브제와 주제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공간 구조로 인해 늘 작가의 의도와 결과가 엇갈린 듯 보이고, 그렇게 환상적 현실이 된다. 그는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비약에 따른 생동한 것으로 변환을 꿈꾸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장성은의 사진은 환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반추하게 한다. 마술적 사실주의 또한 등장인물의 행동을 유발하거나 억압하는 동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작가는 우리가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에 반대되는 무엇이 아니라 현실의 구성 요소로서 실재성을 확보한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언급한 것처럼 진정한 의미의 현실은 불가시적 세계로 둘러싸인 포괄적인 전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작업하기 : 온라인(가상공간과 NFT화 한 디지털 이미지)’와 ‘전시하기 : 오프라인(현실공간과 물질로서의 사진)’의 두 방법론을 교차하고 접목한 프로젝트로, 관람객은 전시장에서 본래 작가의 작업 방식으로 제작된 사진과 이동형 모니터를 만나게 된다. 오프라인에서 ‘전시하기’ 된 사진은 갤러리 공간과 개발자가 구현해 낸 온라인(가상 공간) 상에 보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작업하기’는 인화된 사진, 온라인 전시장 속 사진의 디지털 이미지, 그를 기반으로 제작한 무빙 이미지로서 제작된다. 이렇게 전시를 전유하는 8점의 사진들은 비교나 대조를 통해 장단점을 논하거나 더 나은 것을 찾기 보다는 각각의 층위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의 네러티브를 만들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얼핏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방법론을 병치하여, 실제로는 사진 매체가 이미지로서 작동할 때 같은 인식 체계를 공유하는 것에 주목하여 본다. 그리고 그 작동 환경을 살펴, 당대가 겪고 있는 거대한 변화 과정을 사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형상화 하고자 한다.

《to my birthday》는 (온라인 상에서의) 작업하기’와 ‘전시하기’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못하며 해답 또한 이후로 미루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전시로 정리하기에는 메타버스 (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 라이프 로깅 (Life logging), 거울 세계 (Mirror Worlds), 가상세계 (Virtual Worlds)와 NFT의 지형도가 변화무쌍하고 복잡다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 사진에 몰두한 작가와 3D 개발자, 영상 기술자, 웹 개발자가 함께하면서 나름 각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의견을 조율한 성과물로서 충분한 의의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의 작업에 오래 머물면서 하나의 질문을 더 챙겼다. 하나의 이미지엔 누군가(무언가)의 인생을 나타낼 운명이 내제되어 있는가? 위화는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장성은의 사명은 존재와 세상을 대하는 ‘그만의 태도’일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