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리듬》 전시전경 © 챕터투

전시장 문을 밀고 들어선 데스크 아래에 큐알코드가 있었다. 왼쪽 공간에서는 소음과 함께 허공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돌고 여러가지 영상이 펼쳐진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사기 필름이 무한 회전 중이었던 것이다. 어떤 내러티브인지는 이영호 작가의 이전 작업들을 비메오에서 찾아보고 감을 잡았다.

증강현실을 구현한 덕분에 예술과 환영 그리고 그 객체까지 보여준다. 테크놀로지/미디어/에이아이/챗지피티/매체미학/인공지능/증강현실. 이런 낱말들이 그냥 말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실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그 속에서 실제로 미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확실히 예술가는 현실을 만들었다. 그 방을 들어갔을 때 이미 쇼윈도에서 보았던 세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전시장 밖 윈도 갤러리에는 영사기를 포함해 영화 관련 물품들을 디스플레이했다. 일종의 제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전시를 관람하러 갔을 땐 본전시/극장의 예고편이 아닌 현실 세계 앞에는 마침 우연히 택시가 서 있었다. 내게는 바로 거기가 현실의 암호처럼 여겨졌다.

다시 들어 갔을 때 큐알을 찍고는 마치 뒤샹의 세계를 보는 것 같고 내가 그 사이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음악의 정오표〉는 1913년 마르셀 뒤샹이 만들었으나 그의 생전에는 실연되지 않았다. 그 현실의 알리바이는 예술이었다. 이영호는 이러려고 이렇게 만들었나. 작가가 설명하는 스토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어쩌면 문학에서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한 줄거리 배열을 의미하는 아나크로니의 기법이 구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이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증강현실이 전시장과 스마트폰의 화면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다른 화면이 감당하고 있다. 그것을 배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전체적이다. 여기에 그저 매체와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말할 수는 없다. 예술가의 욕망이 과연 나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아마 욕망, 혹은 그 대상이 다른 것 같다.

뿌연 안개의 연출은 의미심장했다. 스스로 그것을 드러내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매개인가? 스토리가 있는데, 나름 연결해보면 가다가 막힌다. 원래 그것을 의도한 것인가? 이러한 판타지는 미학적으로 오래전부터 논의 대상이다.

회화, 영화, 그리고 매체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장소를 세계 혹은 현실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주 오래전 재현의 방법들이 미술평론가의 고유한 관심사였던 시대가 있었다. 재현의 정확도야말로 환영을 완벽하게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루트를 추적한 것이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이다. 그런데 풍경은 객관적일까, 주관적일까? 20세기의 미술은 그 사이에서 유동적이었다. 그러다가 유럽 미술에서는 손을 놓아버렸다고 프랑수아 줄리앙은 『풍경에 대하여』에서 단언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서 대위법적으로 지속되었는데 거기를 동시대 미술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지평과 장소성이 스며든다. 새로운 국면에 대하여 테크놀로지가 지시하는 예술의 객체는 또 다른 객체이다. 매체와 미학이 혼융하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매체 미학의 이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바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만드는 현실은 낯설고 난해하며 그 풍경과 우리가 사는 세상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도 쉽지 않다. 이것은 미메시스의 미학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여기에서 이영호가 염두에 두는 지점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엔지니어와 피디 그리고 예술가라는 관계를 작가로부터 들었다. 아마 그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이 예술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