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희(b. 1987)는 디지털 공간에서 예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미래의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시각언어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특히, AI, AR과 같은 게임 엔진을 작업의 매체로 사용해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가상의 내러티브를 새롭게 실험하고 탐구한다.
 
이러한 관심은 기후 비상사태를 인식해 인류세 이후 전개될 일들을 상상하기 위함이며, 다양한 세계관과 대안적 사고방식을 연결하는 토대가 된다.


정서희,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 2019, 단채널 HD CGI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22초 © 청년예술청

정서희의 작업은 주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환경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살펴보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를 통해, 그는 미래의 인류가 존재할 방식과 새로운 사회 구조 및 생태계를 상상하며, 이를 디지털 프로세스로 사변적 세계를 건설한다.
 
이를테면, 총 3부로 구성된 ‘Hyperobjects’ 시리즈에서 작가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세계-생태가 낳은 재난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현재를 재인식하고 인류세 이후의 미래에 대해 상상한다.


정서희,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티저 영상), 2019, 단채널 HD CGI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22초 © 청년예술청

첫 번째 에피소드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2019)에서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흔적을 추적하고 기록하며, 과거의 재난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현 상황을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정서희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한 도시 전체를 생물학적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초과물적 재난이라 보았다. 단기적인 경제 이익에 기반한 결정으로 원자로 3기가 멜트다운되었고, 일본 국토와 태평양 수천 평방킬로미터 지역이 오염되었으며, 16만 5천 명의 후쿠시마 주민들은 고향을 잃은 피난민 상태가 되었다.


정서희,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티저 영상), 2019, 단채널 HD CGI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22초 © 청년예술청

한편, 초과물로 덮인 파국의 장소, 후쿠시마는 지구가 인간 없이도 계속 돌아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구글이 촬영 장비를 투입해 이러한 사고 지역의 거리 모습을 담은 스트리트 뷰를 따라가 보며 폐허가 된 도시를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은 방사능 피해 우려로 통행이 금지된 원전 주위 20km 이내 지점을 가상의 게임 캐릭터로 탐방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 지역이 어떻게 됐는지 돌아보며, 친숙하지만 갈 수 없게 된 세상을 시뮬레이션한다. 폐허가 된 마을, 아이들이 떠난 빈 학교,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 가득 쌓인 폐기물의 현 상황을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표방한다.


정서희, 〈Hyperobjects: Episode II – Year 0〉, 2021, 단채널 비디오, 14분 3초, loop ©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두 번째 에피소드인 〈Hyperobjects: Episode II – Year 0〉(2021)은 지구의 기후가 붕괴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화된 다큐멘터리다. 이 작업에서 정서희는 데이터처럼 취약한 인류세부터 근미래-먼 미래를 넘나들며 상상의 유니버스를 구축한다.
 
영상은 완전히 변모한 세상을 마주한 미래의 개체인 하이브리드가 단절된 과거의 흔적을 통해 인류와 연결되어 조각난 세계를 다시 완성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게임화된 초현실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풍경을 탐색하며, 환경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인간/비인간의 관계, 사회 구조와 개인 그리고 공생을 리부트 한다.


정서희, 〈Hyperobjects: Episode III – Ground 0〉, 2022 © 정서희

마지막 에피소드인 〈Hyperobjects: Episode III – Ground 0〉(2022)는 기후 위기, 팬데믹과 신 냉전으로 인해 자유주의와 후기 자본주의라는 약속이 운명을 달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계속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던 찰나, 견고하게 쌓은 바벨탑의 고층에 거주하던 상위 1%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지하 벙커에 비밀 도시를 복제한다.
 
무너진 세상 속 탄생한 도망자 커뮤니티의 아이는 고립된 삶을 이끌어 나가며, 운명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한다.


정서희, 〈Hyperobjects: Episode III – Ground 0〉, 2022 © 정서희

이 영상은 디스토피아적 미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현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공간에 새겨지고 재상산되는지 탐구한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종말의 두려움에 대한 대응물로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매개되지 않은 잠재력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작가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세계관의 형성은 현실을 상징화하는 방법이 된다. 즉, 특정 상황 및 행동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정서희, 〈LUCA〉, 2023, 단채널 HD CGI 비디오, 컬러, 사운드, 8분 57초 © 정서희

이러한 정서희의 작업은 예술 실천으로 대화의 틀을 재구성하여 우리가 직면하기로 선택한 문제뿐만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어떻게 ‘작품’이 알려주는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새로운 다중 진입점과 경험을 재고할 것을 촉구하는 데서 나아가, 우리에게 새로운 연합 및 인식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2023년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정서희는 모든 생명의 기원이자 조상이 되는 가상 캐릭터 ‘루카(LUCA,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를 중심으로 한 게임 형식의 다큐멘터리 작업 〈LUCA〉(2023)를 선보였다.


정서희, 〈LUCA〉, 2023, 단채널 HD CGI 비디오, 컬러, 사운드, 8분 57초 © 정서희

영상은 ‘루카’를 매개로 신화적인 과거와 예상된 미래의 내러티브에 바탕을 둔다. 작가는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시간을 넘나들며 현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루카를 둘러싼 환경과 인간 사이에 기묘하게 얽힌 스토리를 구축해간다.
 
이는 인류가 파괴되어 생태적으로 붕괴한 시대에 비인간과 인간 간의 상호교차성을 상상하게 하며,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


《사랑의 요람》 전시 전경(오시선, 2024) © 서울시립미술관

이듬해 오시선에서 열린 개인전 《사랑의 요람》에서는 〈LUCA〉의 스핀오프 버전 〈Cradle of Love〉(2024)를 선보였다. 〈Cradle of Love〉는 공상 과학적 배경의 미래 세계에서 자율주행차 ‘요람’과 주인공 ‘레이’가 마주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웹 CGI 기반의 인터랙티브 영상이다.


정서희, 〈Cradle of Love〉, 2024, 게임화된 CGI 비디오(컬러, 사운드), 태블릿 컨트롤러, 웹 서버, 8분 27초 © 서울시립미술관

본토인 지구를 복제한 지구-우주 경계의 대안 행상 네오 스피어에 거주하는 루카의 형 ‘레이’는 거대 자율주행차 기업 ‘Cradle’ 사의 촉망받는 AI 엔지니어다. 그가 개발에 참여한 100% 자율주행 레벨로 설계된 ‘요람(Cradle)’은 최고의 안정성을 추구하며, 탑승자 보호가 최우선인 스마트 모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는 ‘하이퍼 슬립’ 기능을 테스트하며 냉잠에 들었고, 요람은 레이를 싣고 네오 스피어 밖의 우주로 함께 떠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네오 스피어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보이드-아웃’이라는 기이한 현상으로 인해 행상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요람》 전시 전경(오시선, 2024) © 서울시립미술관

관객은 총 4회에 걸친 선택지를 부여 받게 되며, 요람을 따를 것인지 혹은 행성에 돌아갈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개별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로서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정서희는 사변적 내러티브 안에서 관객이 직접 결정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기술 가속화 시대에 인간 연결(Human Connection), 기술 윤리와 같은 가치에 대해 각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기술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찰하게 한다.


정서희, 〈미래 게이트〉, 2025, 단채널 CGI 비디오(컬러, 사운드), 구글 스트리트 뷰, 1분 13초. 《포인트 니모》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5) © 정서희

한편, 2025년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열린 단체전 《포인트 니모》에서 작가는 2019년작 〈Hyperobjects: Episode I – The Forgotten Town〉의 후속 작업인 〈미래 게이트〉(2025)를 발표했다. 이 영상 작업은 멈춰버린 시간 속, 다시 잊힌 마을을 향한다.
 
작가는 분절된 장면들이 빠르게 교체되며 맥락 없이 흘러가는 화면을 통해 폐허가 어떻게 단발적인 스펙타클로 소비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휘발되는 이미지들은 시각적 잔상을 남긴 채 사라지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서희, 〈그라운드 0: 리로디드〉, 2025, 게임화된 다큐멘터리, 단채널 HD CGI 비디오(컬러, 사운드), 7분 54초. 《나는 정복당했다》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2, 2025) © 아트스페이스 보안

이와 같은 정서희의 작업은 오늘날 지구 내 존재들이 직면한 생태계 위기와 고갈, 소멸, 파괴 등에 근거하여 아포칼립스에 대한 불안과 상상을 반영한다.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린 그의 영상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이것이 우리가 바라던 세상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찰로 이끈다.

"제 작품은 기술, 환경 문제 그리고 인간 관계의 복잡함을 탐구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질문합니다." (정서희, 서울시립미술관 2024 신진미술인 인터뷰 중)


정서희 작가 © 서울시립미술관

정서희는 영국 런던의 UCL Slade School of Fine Art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개인전으로는 《사랑의 요람》(오시선, 서울, 2024), 《Ground 0》(오시선 웹, 온라인, 2022), 《Year 0》(오시선 웹, 온라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나는 정복당했다》(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5), 《포인트 니모》(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5), 《우리라는 이름의 바다》(경북대학교 미술관, 대구, 2024), 《토성의 고리》(부천아트벙커 B39, 부천, 2024),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정서희는 서울시립미술관 ‘2024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