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형제, 〈적막의 시대〉, 2012, 단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16분 48초 © 무진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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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형제의 영상은 관념적 허구와 보편적 현실들이 교차하는 화면구성의 서사구조, 그리고 담담한 내레이션이 특징이다. 마치 하나의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그들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해석된 결과물이자 사회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예술가의 실천적 내러티브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 속 허구적 관념과 객관적 현실의 구조는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화면 곳곳에 배치된 추상적 존재와 수수께끼 같은 텍스트들은 흥미로운 우화처럼 다가오지만 그 이면에 내재된 획일적이고 범주화된 사회모습은 흔들리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할 관계가 알 수 없는 사회적 구조와 결합하여 왜곡되고 개인화된 모습으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는 무진형제는 사실과 같은 가상적 이야기 전개와 그 안에 담겨진 이질적이면서도 친근한 장치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전환시킨다. ‘아도르노’는 “사유의 가치는 사유가 친숙한 것의 연속성과 얼마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가를 통해 가늠 된다” 2 고 전한다. 무진형제는 ‘아도르노’와 같은 사유가 관철되도록 사회적 조건의 틀을 뒤섞어 재구축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이 모든 것은 지금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모색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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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은 어떤 부류 안에 분류될 수 있는가?, 당신의 발화는 무엇에 일치하는가?, (중략) 너는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 의심하게 만들어 우리가 존재할 권리 자체가 붕괴된 것처럼 , 그래서 사람들은 해야 할 최선을 입 닥치고 내면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막의 시대〉는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업 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묵묵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1902호 여자’를 만날 수 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기계를 다루고 물건을 제작하는 손길은 흡사 노동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한편, 자신이 만들어낸 물체들을 연결해 자신의 몸 전체에 둘러쓴 모습은 마치 부조리한 현실 구조가 계속해서 순환되는 현상을 암시한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동의 실현이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실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1902호 여자’는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질서의 함정에 갇혀있다.

무진형제는 〈풍경(風經)〉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좀 더 극대화 시켜 나아간다. 〈풍경〉은 정감도 출구도 없어 보이는 작업공간에서 무언가 성스러운 것을 보존하고 지키고자 노력하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어떠한 신념에 내재된 듯 움직이는 두 형제와 아버지의 행동규범은 사람들이 바라는 관념적이고 허구적인 신념을 지키지 못해 유죄를 선고받은 죄인처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나’라는 존재는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역할과 위치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미의 몸과 사자의 얼굴을 한 ‘미르메콜레온’은 그 어떤 위계질서에도 위치시킬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개미의 위치에도 사자의 위치에도 자리할 수 없는 ‘미르메콜레온’은 결국 자신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죽어간다. 어느 역할에도 자리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만 살아 갈수 있었다면 ‘미르메콜레온’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모든 것이 범주화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특이성을 가진 개체로는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의 우려로 비춰진다.

〈적막의 시대〉와 〈풍경〉에서 제시된 모든 생명체들은 정해진 규범 안에서 표준화된 삶으로만 살아야 하는 현실적 존재를 대변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타인의 시선과 헤게모니적 정체성이 내면화된 제한적 세계의 형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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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飛化)〉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가족은 시어머니에 시달리는 며느리. 병든 아내. 가족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이어진다. 인간의 결핍을 보듬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의 모습은 폭력과 가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마저도 인간의 욕심과 규격화된 가치관으로 인해 점점 비인격화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구렁이 아이 - 구아’는 태어났다.

구렁이, 구렁이 아이, 땅새와 같은 신화적이고 의인화된 존재는 현실의 모순적 상황의 은유적 표현이다. 세상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낙오자의 모습이자 자본과 이성으로 인해 소외된 현대인의 상징적 자화상이다.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이기에 모든 자연을 대상화하여 균열시켰고 그로 인해 폐허가 된 세상을 돌아보며 그들이 가졌던 모든 위계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관습과 동일성으로 상처받은 자아는 빈곤과 개발이라는 환경에서 또 다시 상실된다.

〈더미〉의 ‘이토이토 할멈’은 폐허와 같은 현실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희망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이토이토 할멈’은 무너진 공동체의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생명을 다스리고 연결하는 소통의 장치로 표현된다. 무술적 존재와 같은 ‘이토이토 할멈’은 보편화된 삶의 모습에서 제외되고 부서진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이자,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형상으로 반영된다.

폐허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다시 쌓아 올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마치 자본의 논리 속에 자리 잡은 재생산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의미는 현실적 메커니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선순환적인 이치를 따를 뿐이다. 자본에 의해 무너진 현실 앞에서 생산이 아닌 구축, 개발이 아닌 건설을 향한 실천적 행위의 저항으로서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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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은 우리의 사유가 이미 정해진 동일성의 체계에 프로그램화 되어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논리 자체를 전복하길 권하고 있다. 지금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뒤집을 수 있는 저항의 방법으로 우리의 사유와 행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전하는 것이다.

무진형제는 ‘M’ 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편적 정체성을 비판하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어두운 지하터널을 청소하는 〈결구〉의 주인공 ‘M’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개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같은 슬로건이 신념이 된 ‘M’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보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하게 된 ‘M’은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M’은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자신과 다른 삶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해왔던 모든 행동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시작용에 불과 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M’은 현실의 구조를 깨닫고 미로와 같은 지도를 살펴본 후 또 다른 어둠의 길로 떠난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떠나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 반복되는 사회적 조건에서는 그 어떤 실천적 행위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동일성의 체계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차이의 담론도 그 안으로 다시 포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은 지금의 현실 체계는 전복이 필요 하다는 것을 암시하듯 또 다른 어둠속으로 향한다. ‘M’의 행동과 어둠속 장소는 다소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무진형제는 그 불안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메커니즘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과 사유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통로에서 〈오드라덱〉과 마주한다.

허구적 존재인 ‘오드라덱’은 잡을 수 없는 신념이자 해결되지 않는 답과 같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삶을 찾는 여정이며, 늘 무언가를 따라가야 하는 강박증 같은 우리의 사고를 그린다. 그렇게 무언가에 강요된 무의식의 세계를 묘사하며, 우리가 진실된 삶이라고 믿는 것들이 빈약한 허구와 같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드라덱’은 잡을 수 없는 가능성임과 동시에 -차이와 다양성이 가득한 현실을 돌아보도록 유도하는 해법일 수 도 있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M’의 행동과 ‘오드라덱’의 존재는 지금의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염원의 실마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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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형제는 그들의 내면에서 시작된 예술적 시선을 외부로 옮기며 공동체를 바라본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공공미술로 구성된 〈M의 장(場)〉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상실해 버린 자아를 찾도록 유도한다.

자신들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장치로서가 아니라, 서로의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고 나누기 위한 의도로 위치한다. 그것은 자본의 착취와 억압이 구사하는 힘의 작용을 자신과 타인의 목소리로 듣고자 한 것이며, 그 의지가 세상에 관철 될 수 있도록 공적공간으로 장소를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한 저항의 행동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우리 자신이 이미 이데올로기의 일부라면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변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M의 장〉이 갖는 역할은 우리 삶의 가치가 사회적 논리와 헤게모니적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경험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지금의 불편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어떤 권력이나 권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고 환대하는 과정 속에서 안정된 사회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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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도록 구성된 사회에 놓여있다. 그 속도는 언제나 우리의 깊이 있는 사유와 관찰을 간과하기에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자문하는 예술가의 역할이 간절해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실의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를 견지하는 무진형제의 예술적 시선은 의미가 있다.

영상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맥락은 지금의 현실 모습을 암묵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안에 등장하는 모든 생명체와 오브제들은 사회적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주변의 존재로 표현된다. 보편적 삶의 토대 위에서 파편화된 상처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행위는 사회적 맥락을 짚고자 하는 무진형제의 예술가적 실천이자 노력이다.

존재 할 수 없는 것들을 호명하여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익숙한 것들을 변형하고 재구성한다. 그렇게 창조된 초현실 같은 실체들은 저항을 위한 사유로 전환된다. 여기서 우리는 ‘아도르노’가 언급한 ‘사유의 가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분석적 능력을 저하시키는 힘의 구조를 밝히는 것으로 예술가의 역할과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무진형제의 예술적 실천은 분명하다. 일반적 사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비현실적 존재들과 서사구조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위한 대안적 분석과 지금의 현존성을 진단하는 담론의 역할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