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 〈추적〉, 2011 © 이영호

전시로부터 향연으로

1. 요리와 일탈

“그렇게 정신없어 하지 말고 오늘은 집에 가서 편안한 마음으로 요리를 하게나...... 그리고 친구도 몇 불러서 같이 즐기는 게 어떨까?” 건축에 한창 빠져 있던 학창시절, 밤새도록 그려 온 디자인 안을 크리틱 받는 동안 스트레스가 쌓여 갈 즈음, 지도교수님께 가끔 듣던 소리다. 그 땐 그 뜻을 몰랐다. 그런데 당시의 지도교수님의 연배가 된 지금 생각해보니, 마치 칭찬이나 혹평을 퍼붓는 것을 통해서 요리라는 대상이 가진 우연성과 가변성을 메꾸어 가듯이 건축에서 아이디어의 다변성을 정리해보라는 암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또는 복잡한 구상을 손쉬운 조리법으로 통합시키는 전문가의 요리를 탐구해보란 뜻이었을 수도 있다. 정상(頂上)의 요리가 단순히 다양한 재료를 모으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그 교수님의 충고가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 그저 재료를 뒤섞기만 해서는 진정한 통합을 이끌어낼 수 없으며, 그렇게 만든 투박하고 서투른 요리는 맛도 없을뿐더러 거북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흔한 재료 두세 가지를 적절하게 배합하고 진정한 솜씨를 발휘해서 독창적인 맛을 이끌어 낸다면 진정한 요리의 의미를 알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셨을 것이다. 요즘은 나도 가끔 아마추어 학생들이 디자인을 그저 덧붙이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습성을 꼬집을 때 이런 말을 한다. 부분과 전체를 이루는 이질적 존재들의 건강한 오염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건축 디자인 역시 재료, 디테일, 입면, 그리고 공간적 구성이 서로 맞아 들어가야 정상의 품격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요리하듯이 불필요한 재료나 맛을 덜어내는 작업, 그리고 원재료의 자연스런 맛을 제거하는 재료들을 빼내는 동안 정말 입맛에 맞는 멋진 건축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영호, 〈추적〉, 2011 © 이영호

2. 충돌 또는 오염

앞서 말한 건축 디자인과 요리의 관계는 건축 디자인에다 요리에 속하는 내용과 형식을 전용(轉用, epiphora)함으로써 요리의 양상이 건축에서의 디자인 행위로서 이해되어지길 기대하는 유추적 관계가 깊다.

그러나 이 전시가 표방하는 요리와 음악, 영상이 ‘영역 간 제휴’를 통해 시대성을 재현하려는 속뜻은 다른 맥락에서 읽혀진다. 그리고 이 콘텍스트 속에서 유독 요리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전시의 소재가 신선해서라기보다는 세 영역을 통틀어 음식에 관련된 감각작용이 좀 더 포괄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음악이 청각을, 영상이 시각을 자극하여 지각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음식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지각되어지는 매체라는 것이다. 시각, 미각, 후각, 청각(음식재료가 씹히는 소리), 그리고 촉각까지도 음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음악과 영상, 그리고 요리가 공존하는 이 전시공간에 대한 기대가 사뭇 크다.

보고, 듣고, 먹는 일상의 행위들이 어떻게 재발견되어질 것인가, 전혀 생소한 이 세 개의 영역이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 간의 충돌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낼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영역을 조화롭게 배합하려는 시도는 무모한 도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작업을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서 각각에 대한 경직된 지식이나 이성적 이해, 그리고 관례적인 지각작용에 대해 전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내용과 형식을 몽타주할 때 생기는 충돌 즉, 에이젠슈테인이 말하듯이 실재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 실제와 다르게 상징화되면서 생기는 대립과 충돌을 촉매제로 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각각이 가지는 내용을 전시장 공간에서 맞물리거나 반동하게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게 해주고, 세 가지의 표현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생성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이다.

또는 로트레아몽(lautreamont)의 ‘해부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의 우연한 만남’과 같은 초현실적 산만함을 수용하는 편이 관람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게끔 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두 가지 이상의 상이한 요소를 병치시키거나 상호 간섭하게 하여 일상적인 지각작용을 왜곡시킴으로써 ‘보는’ 전시에 훈련된 경직된 지각 구조를 동요(動搖)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지각구조를 바탕으로 공간 볼륨의 상호간섭이나, 고정된 공간 내부에서 개구부의 조작에 의한 빛의 유입을 통하여 다른 성질의 공간을 형성하는 다양한 실험을 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현실을 외면한 사디스트 적 유희로서가 아니라, 대상 또는 우리주변을 둘러싸는 현상들의 본질을 드러내어 구체화시키는 전시 방편이 관건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람자가 현상에 대한 본질을 깨닫고 이와 관련지어 일반적이고 특별한 사실들과 환경,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을 다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를 생산하는 그릇”으로서의 전시공간이다.


이영호, 〈추적〉, 2011 © 이영호

3. 맛 대 멋: 전시로부터 향연으로

요리의 역사 이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미각의 역사일 것이다. 요리는 맛이라는 감각의 역사를 통해 상상 되어지고 경험에 수반하여 결여된 부분을 보충하면서 문화를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각(taste)은 맛과 기호(또는 멋)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피천득은 「맛과 멋」에서 맛이란 멋에 대해 표피적이고 즉각적인 것으로,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는 맛은 몸소 체험을 해야 하지만, 멋은 바라보기만 해도 되기 때문에 맛에 지치기 쉬운 자신은 결국 멋을 위하여 살아가고 싶다고 염원한다. 그런데 오늘의 문화는 어떤가? 과연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충만한 단정한 멋을 뽐내고 있는가? 아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뒤섞인 거대한 먼지구름처럼 혼돈의 상태에서 부유하고 있다.

이 혼돈의 상태는 ‘차이들이 뒤섞여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체험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서는 문화 속에 숨겨진 구조를 파악하기 힘들게 되었다. 요리와 음악, 그리고 영상이 뒤섞인 전시 역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책 『상상 동물 이야기』 속에 나오는 키메라(Chimera)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각각의 고유성이 해체된 후, 그 파편들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연장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이 전시의 특징은 ‘이질성의 동화’ 또는 ‘차이의 재의미화’로 요약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세 가지 영역이 충돌하는 순간이 흥미로울 수 있다. 충돌하는 순간, 단순히 또 다른 파편과 뒤섞이며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켜 갈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오염시킴으로써 아이젠슈타인이 몽타주 기법에서 유추했던 ‘한자(漢子)의 의미 생성’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왜냐하면 요리란 실험적으로 아는 사실보다는 경험된 것들,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노력(또는 알고 있던 것을 부정하는 노력)과 이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새로운 대상으로 환원하여 또 다른 맛과 멋을 만들어 내는 짓을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