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은, 〈Rue Visconti〉,2006, 라이트젯 프린트, 200 x 160 cm © 장성은

미술사(혹은 그에 인접한 담론들)를 공부하다보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대한 논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먼 거리’에서는 한 눈에 대상 내지는 공간의 전체상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세부의 촉각적 확실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반면에 ‘가까운 거리’에서는 확실히 세부의 촉각적 확실성을 경험할 수 있다. 전자(먼 거리)에서는 시각이 후자(가까운 거리)에서는 촉각이 우세하다.

누군가는 먼 거리/가까운 거리, 시각/촉각의 관계를 사유/감각의 관계로 확장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탐색하는 것은 시각/촉각, 사유/감각의 관계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나는 지금 발터 벤야민의 시각적 촉각성에 대한 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장성은의 사진 작업을 관찰하면 이 작가가 택한 묘한 거리, 곧 멀다고도 할 수 없고 가깝다고 하기에도 뭣한 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작가의 작업 앞에서 누군가는 좀 더 열린 시야(시각성)를 기대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좀 더 분명한 세부(촉각성)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성은의 정지된(still) 사진은 이쪽, 또는 저쪽으로의 운동을 잠재적으로 내포한다.

이 묘한 거리는 이 작가의 작업 전반에 접근할 하나의 단서다. 예컨대 초기작인 〈Blind Sound〉(2008)에서 장성은은 눈을 가린 상태에서 공간을 탐색할 것을 요구받은 어떤 사람을 보여준다. 눈을 가린 상태, 곧 시각이 무력해진 상태에서는 다른 감각들이 활성화된다. 즉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 이전에는 만져지지 않았던 것이 만져진다. 그러한 체험을 작가는 가시화했다. 그것을 일종의 추체험을 통해 듣거나 만지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또한 〈Rue Visconti〉(2006)는 좁은 길을 사람들로 빽빽하게 채워 그 길의 넓이를 측정한 작업이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그 길의 넓이는 19명이다” 같은 것이다. 이로써 이전에는 시각성이 좀 더 우세하던 공간 경험이 촉각성이 두드러진 공간경험으로 전환된다. 우리의 눈은 가깝게 밀착된 사람들의 접촉을 향할 것이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촉각성을 환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성은이 제시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내지는 ‘시각적으로 촉각성을 제시하는 방식’은 어떤 긴장을 촉발시킨다. 긴장(tension)은 외연(extension)과 내포(intension) 사이에서 작동한다. 즉 밖으로(ex-) 향하는 것과 안으로(in-) 향하는 것 사이에서 긴장이 촉발된다. 가령 〈Beige Curtain〉(2012)에서 우리는 커튼에 매달려 있는 어떤 인물을 목격한다. 일반적인 통념에 비춰볼 때 이것은 ‘분노’나 ‘속상함’이라는 내적 강점을 밖으로 표출하는 전형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힘의 조절이 존재한다. 즉 화가 난다고 진짜로 커튼에 매달리면 사달이 난다. 그러므로 분노의 표출은 힘의 조절과 함께 한다. 이것은 내적 상태와 외적 조건 사이에서 작동하는 긴장의 한 사례다. 이 작가가 긴장을 촉발시키기 위해 빈번히 사용하는 장치는 비닐-투명한 막 같은 것이다. 그것은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 또는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면서 동시에 이쪽과 저쪽을 연결한다.

그런데 이 작가가 ‘긴장’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나름의 답 같은 것을 내놓으려면 우리는 다시 그 비닐-투명한 막 같은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그 막(같은 것들)의 존재 양태에 주목해야 한다. 장성은의 많은 작업들에서 그것은 대상(그 대상은 대부분 사람이다)을 감싸고(encasing-◡) 있다. 또는 에워싸고(enveloping-◠) 있다. 그러한 시각적 양태는 가시적인 구도, 내지는 이미지를 통해 감쌈/에워쌈이라는 촉각적 질을 환기한다. “모든 경우에서 시각적 형태들은 인간 조건에 관한 상징적인 언명을 표상한다“는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어떤 인간적 조건을 표상한다.

즉 물리적 형태는 심리적 형태와 동형적(isomorphic)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지금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불안을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한 때 나를 포근히 감싸준 누군가의 품을 떠올릴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것은 우리가 나와 타자,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숙고할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작가는 우리가 그러한 숙고에 빠져들게 되는 경우를 염려한다. ‘긴장’을 유지하려면 빠져듦(몰입)의 상태보다는 ‘산만한’ 상태가 좀 더 적합할 것이다. 〈lunatic dance〉(2013), 〈hanging water〉(2013)에서처럼 막(같은 것)은 종종 뚫려 있는데 그것은 관객이 숙고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또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그럼으로써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다.

그러니까 장성은의 작업은 형식적인 층위에서 진행되는 긴장, 또는 공간의 탐색보다는 오히려 삶의 층위에서 진행되는 긴장 또는 공간의 탐색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는 장성은의 작업에 관한 유희경(2013)의 다음과 서술을 참조할 수 있다.

공간을 생각한다. 그러면 빛과 시간, 멈추고 기울어 어떤 각도를 이룬다. 그 속에 우리는 도착한다. 머무르며 만나고 관계를 이룬다. 떠난다. 그 속에서 ‘서로’의 정체(停滯)를 만지고 정체(正體)를 만든다. 그때 그 모든 요소들의 절묘한 연산으로, 탄생하는 것.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동시에 준비한다. 그것은 감각이고 감정이며 삶이다.

물론 장성은의 작업 전개에도 층위가 존재한다. 예컨대 〈Rue Visconti〉(2006) 이후의 공간측정으로 이름붙인 연작들은 ‘측정’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다분히 지적인 성격을 지닌 작업이다. 여기서 공간은 공간 일반, 또는 추상적 개념에 가깝고 긴장은 긴장 일반, 추상적 긴장에 가깝다. 반면에 〈lunatic dance〉(2013)와 같은 좀 더 최근의 작업에서는 삶의 구체성에서 공간과 긴장을 사고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수영장’. 운동장‘ 같은 구체적인 장소들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수영장을 환기하는 그 푸르스름한 비닐의 주름들은 확실히 이전작업들의 그것에 비해 좀 더 정서적이다. 또는 정감적이다.

이렇게 좀 더 정서적인, 또는 정감적인 작업으로의 전환은 ’난지 시기‘ 전후 장성은 작업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전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로서는 그 전환 역시 ’긴장‘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추상적인 탐색을 구체적인 탐색으로, 개념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함으로써 일반/특수, 추상/구체 사이에서 긴장이 유지된다. 그리고 다시금 게슈탈트심리학의 ’동형성(isomorphism)’이론을 참조한다면 장성은의 작업 전반에서 가시화된(또는 작동하는) 긴장은 이쪽과 저쪽, 외적 현실과 내적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균형을 유지하며 사는 우리 삶의 형태를 닮았다. 물론 그것을 ‘긴장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우리 삶의 표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무너진 긴장의 회복을 촉구하는 윤리적 언명’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우리 각자에게 남겨진 몫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