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운, 〈진실에 접근하기_SKY IM-6100 핸드폰〉, 2005, DVD, 1분 © 신기운

나는 항상 살면서 누구나 느끼고 접하는 부분에 관심이 간다.
나와 내 주변의 문제들, 돈에 얽힌 일들, 한국인으로서 모국어보다 더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현실,
20대를 지내며 겪는 문제들…가령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군대 복무를 회피하고 부가가치들을 누리기 위해 국적까지 포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이러한 것들이 특별한 사건이 아닌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사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이러한 일상이 너무나 평범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어느 순간에 내가 매일 겪는 이러한 고민과 문제들이 비슷한 시간대를 경험하고 있는 같은 연령대의 다른 이들의 일상과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싱거운 것. 그러나 매일 우리의 삶을 채워가는 것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일상이 아닐까. 
— 신기운 작가노트 中, 2005. 5. 9.

신기운의 작업은 현대 사회의 여러 생산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다루는 소재들은 미적으로 보여 지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산물(産物)로 보여진다. 이러한 작업으로 작가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람자가 어떠한 시선으로 접근 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선택한 텍스트는 다르게 읽힌다.


1. ‘지우다’

기계라는 것은 인간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현대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신기운의 작업실에 놓여있는 기계는 작가를 대신하여 오브제를 갈아주는 역할을 한다. 텍스트 혹은 오브제를 천천히 갈아 뭉개도록 설계된 이것은 오브제를 서서히 무력화시켜 결국 가루로 만든다. 어떤 대상을 갈더라도 이 기계가 배설하는 결과물은 하나의 가루일 뿐이며, 부피와 무게, 약간의 색감 정도의 차이만이 관찰될 것이다. 

이 기계는 자신의 ‘몸 안'에 들어 온 사물들을 가루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형태나 성분, 용도가 다른 사물들이 이 기계 속에서 '분말'의 균질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기계에 내장된 지나가는 면에 의하여 일정한 속도로 사물의 형태가 점차 사라지게 되고, 사물이 지녔던 기능과 가치도 지워진 채 가루가 되어버린다. 그것들이 하나의 사물의 형태가 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탄생된 것처럼, 이 작업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죽음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렇듯 기계에 의해 지워지는 사물들을 관찰하다 보면, 사회적인, 물질적인 대상들의 가장 원초의 상태를 떠올리게 된다. 가루에서 원래의 형상으로 되돌려지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게 된다.


2. '지워지다’

작가가 가루로 부수기 위해 선택하는 오브제는 주로 공업품(휴대폰, 리모컨 등), 책, 일상생활에 흔히 쓰이는 사물들이다. 가는 기계의 '먹이'가 되는 책들은 법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영어사전 등이다.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에게 어떠한 효용을 주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책들의 가루가 되었다가 다시 종이로 제작되어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것들이 지닌 형상이 지워지게 되면서 그 대상이 지니고 있던 사회적, 물리적 기능 또한 사라지게 된다. 한낱 물질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는 기계’ 속에서 전자제품이 갈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부품들의 조합으로 일상 생활에서 편리한 통신기능을 수행하는 핸드폰을 들 수 있다. '가는 기계’ 속에 놓인 핸드폰은 기계가 돌아가며 서서히 누르는 힘에 의해 액정이 깨어지면서 가루형태의 물질로 변해버린다. 핸드폰, 컴퓨터, TV와 같은 문명의 이기들은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은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로 만들어졌으면서도 그 편리함 때문에 인간들을 지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도구 없이는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좀더 나은 기능을 가진 제품들이 앞다투어 시장에 나오고, 얼마 전까지 신제품이었던 것들이 몇 달이 지나면 '최신'이라는 단어자체가 무색해져 버린다. 신기운의 작업은 이러한 문명의 산물들을 환원시킴으로써 그것들이 우리들의 일상을 얼마나 잠식하고 있는지 자각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신기운, 〈예술이란 무엇인가〉, 2004, 간장, 커피, 230 x 115 x 1 cm © 신기운

3. 다시 '만들어지다.’

작가는 '가는 기계'에 의해 '가루나 조각'이 된 물질을 이용하여 다시 '종이'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재생종이 위에는 갈려진 텍스트와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밀접하게 상관되는 이미지들이 그려지거나 프린트된다. 작가는 돈, USA 비자 등을 이미지화 하고 이것을 이미지화 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맛보았거나 새로이 즐겨 마시게 된 음식들(커피, 간장, 케챱)을 뒤섞는다. 

간장과 커피로 그려진 커다란 만원 작업,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한 간장 공장의 갤러리 전시를 위해서 작업되었다. 간장 공장에서 전시하기 때문에 간장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우연성이 더 재미있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만원 이미지의 바탕이 되는 것은 수잔 K.랭거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론서 한 권이다. 우리가 내용을 얻기 위해 읽는 대상인 책이 하나의 내용을 담는 바탕이 되었다.

책이 종이가 되어 이미지를 담는 바탕이 되었다면 분말형태가 된 기계 제품들은 역방향으로 편집되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 ‘진실에 접근하기’ 시리즈는 디지털 카메라로 일정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촬영된 이미지들이 하나의 DVD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진실에 접근하기’는 작가가 일상적인 삶에서 보이지 않는 이면을 제시하고 있다.

영상작업과 가는 기계 사이, 만들어진 종이를 구성하는 텍스트들과 프린트된 이미지 사이에서는 새로운 의미의 충돌이 생겨난다. 작가는 모든 것이 금전적인 경제 산물로 치환되는 현대 사회의 풍경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들을 재발견하게 한다. 어쩌면 관람자는 평소 익숙하게 보아왔던 대상 속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미를 건지게 될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