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근 신기운은 가로 2m가 넘는 거대한 화폐를 비롯해, 여러 개의 화폐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즉 이전과는 달리 어떻든 뭔가를 만든다는 것이 신기운의 태도를 덜 급진적인 것으로 재정의할 만 한 단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가 예술품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반(反)-예술품’을 만들므로써 예술의 순수영역을 계속 더럽히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신기운의 세계는 ‘나도 작업으로 먹고살고 싶다’고 외침으로써, 즉 예술에 대한 ‘정상적인(?)’ 욕구를 치기어린 욕망의 수준으로 등치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전히 예술의 능멸에 가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기운의 케챱이나 간장으로 그려진 화폐의 문제제기를 ‘예술은 곧 돈이다’라는 식으로 툭 내뱉곤 했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방식으로 포괄하지는 말기로 하자. 그것은 너무 선동적이고, 식상하게도 허풍스런 구도자의 인상을 풍기거나, 진지한 척 하는 예술사회학자의 웅변술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오늘날 눈귀를 틀어막은 바보를 제외하면 누군들 그 위악스러운 사실을 모르랴! 문제는 거창하게 사회와 시대를 구술하는 구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손바닥만한 실존 안에서 가련하게도 버둥거리는 한 개인이다. 일테면, 만 원권 지폐 앞에서 ‘예술은 무엇인가’를 점잖게 묻다가 그 품위있는 질문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도 작업으로 먹고살고 싶다’고 외쳐대는 한 개인 말이다.
신기운은 이 문제를 전적으로 자신의 의식과 실존의 문제로 끌어안음으로서, 수잔 K. 랭거(Susanne K. Langer)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전복적으로 답한다. 신기운이 만든-창작한- 만 원권 지폐 그 어디에도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이데아의 표현"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 고상한 내적 가치는 목격되지 않는다. 대체 이 ‘뻔뻔스러운’ 표면 어디에서 로저 프라이(Roger E. Fry)가 언급했던 ‘시각의 정상적인 이용’이 경험될 것인가?
수잔 k. 랭거가 ‘창작의 정당성'으로 뭉뚱그리려 했던 어떤 개념도 설 자리가 없다. 신기운의 세계에서는 실생활의 복잡한 요인들로부터 감각적인 요인만을 선별해내는 가장 확고한 방식인 ‘순전한 비전’이 치명타를 입는다. 1달러짜리 지폐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도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에서 표현되는 단일성(통일성), 유기적인 완전성, 발달, 성장….” 같은 유토피아는 언감생신이다.
사실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대신, 온갖 거만한 권력들을 동반한 채 거드름을 피우면서 접근해 온다. 통일성이나 유기적인 완전성 같은 케케묵은 덕목들 대신, 어떤 것들은 도색잡지로부터, 다른 것들은 천한 정치논쟁이나 어수룩한 미래학에서 마구잡이로 인용해대면서 말이다. 수잔 K. 랭거의 용어들은 더 이상 예술의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작가는 수잔 K. 랭거의 텍스트와 용어들을 갈아 없앤 다음, 그 부스러기들을 만 원권 지폐로 환생시킴으로써 이번에는 예술에 더욱 가혹한 보복을 가한다. 그러므로, 신기운은 여전히 어떤 사물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만드는 화폐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 하나의 지평, 즉 하나의 경계이다.
예술의 처형과 변질된 예술의 환생 사이의, 아니면 창작의 욕망과 생존의 욕망 사이의 경계! 그리고도 예술작품과 화폐, 즉 이데아의 현현과 세속의 침투 사이의 경계, 환상의 실패와 일상의 승리 사이의 경계….
신기운은 예술의 제반 문제를 욕망의 차원으로 정렬시키고, 개인의 문제로 안착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인식론의 사기술들을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 단번에 사변가나 이론가들로선 넘보지 못 할 통쾌한 작가적 성찰에 도달한다. 일테면, 우리 모두에게도 갈아내고 싶거나, 갈아내야만 하는 많은 사물과 이미지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의 채로 쳐내야 할 부유하는 이론들의 숱한 허위… 어떻게 이토록 정확하게 함축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매우 특별한, 짜릿하고 자극적인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