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운, 〈뉴스는 오락이 된다〉, 2008,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6분 44초 © 신기운

“제가 생각하는 ‘소멸’은 오히려 ‘탄생’의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물이든 탄생하기 이전에는 모두 다르지 않다는 전제가 바탕에 있죠. 저는 물리적인 ‘갈다’라는 작용을 거쳐 존재의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갈리는 대상의 사물로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소멸의 강도를 더욱 높이려 했습니다.” 
— 월간미술 2007. 8 인터뷰 중 

1953년 라우센버그는 윌렘 드 쿠닝의 드로잉을 지워버린 덩그런 화면의 캔버스를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빈 캔버스 화면이 남긴 것은 기존의 회화 양식에 대한 명확한 종결, 그리고 새로운 예술에 대한 야심찬 선언이었다. 신기운 작가가 2006년부터 발표해 온 오브제를 소멸시키는 시리즈 작업에서 그 소재가 되는 대상들은 아톰, 수퍼맨, 닌텐도, 아이팟, 동전 등 현대의 젊은 세대들의 위시 아이템(wish item)들이다.

신기운은 이들 아이템을 ‘선택’함으로써 현대 문명에 대한 경외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눈 앞에서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인터알리아 전시장 입구에는 신기운 작가의 화면 속에서 서양 장기인 체스의 말이 차례대로 갈아 없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라인더 기계장치가 이들을 꼭대기에서부터 내리누르며 갈아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벌어지는 현대문명에 대한 ‘학살’ 행위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1982년에 열린 뉴욕 휘트니 미술관 전시에서 백남준은 로봇 K-456을 차도로 내보내 달려오는 차량과 부딪혀 박살이 나도록 의도하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들간에 벌어진 파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기계들간의 서열을 드러냈다.

신기운 역시 대량 생산되고 열광적으로 소비되는 아이템들에 흠뻑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경고등을 켜 주는 듯한 섬뜩한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 동시에 자연계의 약육강식을 은유하는 듯한 느낌 또한 강렬하다. 

신기운의 작품 속 아이템의 소멸과정은 즉석에서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인위적인 행위가 가해져 부서져버리는 ‘인스턴트식 죽음’이다. 이 과정은 생태현상으로서의 죽음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라인더 기계의 작업 후 남겨지는 잔재들은 더 이상의 존재감이 남아있지 않은 가루일 뿐이며 이 부분에서 유기체의 소멸과 공통점이 형성된다. 신기운은 이 일련의 파괴와 소멸의 행위에서 새로운 의미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즉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 숨쉬는 것들의 육신이 점점 쇠퇴하여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고 마는 자연의 섭리가 기계나 현대문명의 산물인 ‘제품’에게는 통하지 않는 법칙일진데, 신기운이 제품들에게 부여하는 죽음은 기능이 다한 후 썩지 않은 채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짐’을 통하여 진정한 죽음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생명력을 발견한다. 

신기운은 오브제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은 영상 작업과는 반대로 2008년도 ‘서울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에서 영상매체의 특징을 활용하여 이미지가 ‘생성’되는 화면을 선보인 바 있다. 와인잔 속에 담겨 있는 물이 점점 차오르며 물속을 통해 주변 이미지가 점차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은 컵 속의 물이 며칠 동안 방치되어 증발하면서 물을 통해 비치던 주변 경관도 함께 사라지는 화면이다.

이 장면은 비디오 조작을 통하여 거꾸로 재연되었으며 화면 자체도 아래 위가 뒤집혀 원래는 거꾸로 비치는 이미지가 온전한 방향으로 보이는 화면이다. 국내에 얼마 안되는 영상작가 신기운의 이 작업은 근본적으로 영상예술의 매카니즘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감동적 시각 효과와 함께 결합되었다. 대중 매체인 TV가 일방적인 전달매체로서의 기능이었던 것을 능동적으로 활용한 백남준의 기계에 대한 창의적 행위와 비디오가 발명됨으로써 조절 가능하게 된 영상 이미지에 대한 확장적인 자율성을 담아내고 있다.

신기운의 영상 속 오브제를 통해 재생되며 점점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는 점점 뚜렷한 상으로 전달되고 주변 화면의 아웃포커스 된 실제 TV화면은 사실 화면 속에서 거꾸로 보여지는데다가 그것이 점점 차오르는 물 속의 영상의 뚜렷한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며 마치 색채들의 아른아른한 움직임 정도로 인식되고 만다. 그리고 화면 전체는 화려하면서도 균형 잡힌 이미지로 완성되는 것이다. 

신기운은 사라짐은 곧 생성이라는 논리를 보여줌으로써 끝과 시작간의 경계의 무의미함, 그리고 기계, 현대문명의 산물, 테크놀로지 등을 이용하여 만물의 생명력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