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형, 〈만들기 쇼〉, 2021, 퍼포먼스 © 정금형

1. 정금형 3.0

인형극, 육체예술가, 의인화된 기계, 퍼포먼스 아티스트...

이제 이러한 단어들을 어설픈 마술사처럼 웅얼거리기만 해도 떠오르는 동시대 한국 미술씬의 작가는 단 하나, 정금형이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작업이 ‘기계를 의인화’할 뿐 아니라 그들과 갖가지 방식으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고, 이를 말 그대로의 인형극과 영상, (렉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종다기한 방식으로 변주해왔다는 것, 특히 2015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하면서 2010년대 초중반부터 ‘다원예술’이란 이름 하에 부상하던 ‘퍼포먼스 아트’의 좌표계를 미술씬의 지도에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7가지 방법〉(2008), 〈유압진동기〉(2008), 〈휘트니스 가이드〉(2011) 등에서 확립한 방법론은, 이후 〈심폐소생술 연습〉(2013), 〈재활훈련〉(2015), 〈소방 훈련 시나리오〉(2016) 등을 통해 흥미롭게 변주됐지만 위와 같은 해석의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작업들은 아니었다는 것 역시, 눈 밝은 이들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의미의 2기는 에르메스 미술상 기념전인 《개인소장품》(2016)을 기점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퍼포머나 퍼포먼스의 물리적 현존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오브제들의 나열, 또는 수집품들의 인벤토리(inventory)가 그의 작업의 중요한 축을 이루게 된다.

《스파 & 뷰티》(2018)전에서처럼 미묘하게 변조된 각종 스파와 여성용 뷰티용품들은 물론, 《Upgrade in Progress》(2020)를 포함하는 유럽서 가진 일련의 개인전들과 올 8월부터 10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장난감 프로토타입》(2021) 전시가 전경화했던 일종의 로봇, 또는 기계 부품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물론 더 섬세히 말하려면, 이렇게 늘어놓은 부품들을 실질적으로 조립하기 시작한 〈홈메이드 RC 토이 Homemade RC Toy〉(2019)가 진정한 세 번째 챕터를 열었다고 봐야한다. 지난 11월 6일과 7일,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정금형의 〈만들기 쇼〉 역시 이 3기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결론을 미리 선취해두자면, 정금형의 작업은 앞에서 환기한 클리셰들이 대충 뭉뚱그리거나 혼동해온 것과 달리, 꼭두각시(puppet)와 인형(doll)이라는 결코 등치될 수 없는 두 축 사이의 고전적 진동을 업데이트하면서, 동시에 ‘매뉴얼’과 ‘튜토리얼’의 차이를 극대화해온 ‘교육학적’ 작업으로 보다 ‘정확히’ 규정될 필요가 있다.


정금형, 〈만들기 쇼〉, 2021, 퍼포먼스 © 정금형

2. 물건들 사이에서 만들기를 보여주기

〈만들기 쇼〉는 이러한 독해에 일종의 ‘리트머스 페이퍼’처럼 반응한 공연이었다. 특히 60분으로 예정되어있던 공연 시간이 90분으로 연장되었다는 공연 당일의 문자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공연은 무언가가 급작스럽게 덧붙여졌다는 인상이 없었다. 작가는 90분 내내 아무런 음악이나 영상의 도움 없이, 공연장 정중앙에 선 자신을 둘러싼 일련의 기계부품들을 하나하나 때론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설명하며,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우직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단, 마지막의 ‘최종 결과물’만 제외하고. 그렇게 지난 기다림을 적절히 보상해줄 법한 클라이맥스 없이-그의 작업을 성적(sexual)인 관점으로 환원해온 이들이라면 ‘중단된 성교(coitus interruptus)’라 기술할 법한- 쇼가 다소 급작스레 막을 내리자, 적지 않은 관객들은 다소 허탈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반응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다른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일단 이 쇼가, 2019년부터 이탈리아와 러시아, 독일 등지에서 펼친 전시들의 연장선에 놓인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해보자. 《업그레이드 진행 중 Upgrade in Progress》(2020), 《작은 업그레이드 Small Upgrade》(2020), 《정비 중 Under Maintenance》(2021)이란 제목들은, ‘업그레이드 중’이거나 ‘정비 중’인 (완)제품이 원래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번 〈만들기 쇼〉에서 90분간 조립한 부품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완)제품으로 귀결될 것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제기한다.

이는 말 그대로 처음과 끝, 즉 알파(A)와 오메가(Ω)에 대한 질문이면서, 〈만들기 쇼〉가 정확하게 이 둘 사이에, 즉 ‘거두절미(去頭截尾)’한 중간 어딘가를 가리키는 라틴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물건들 가운데(in medias res)’에서 작동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작가가 무대에 늘어놓은 수많은 기계부품과 케이블들은 대부분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작가에겐 이들이 어디서 원래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가 그리 중요치 않았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작가 자신이 종종 환기했듯, 그는 자신이 만드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작동시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 될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가 ‘자신이 모르는 걸 만든다’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자기가 만든 게 무엇이 될지 모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정금형이  2009년에 취득한 굴착기 자격증이나, 헬스장 운동기구와 심폐소생술을 아우르는 일련의 ‘자격(증)’에 대해 작가가 들인 노력과 성취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변형시킨다. 이들은 해당 기계, 혹은 넓은 의미의 ‘장치(dispositif)’를 매끄럽게 작동시키는 게 아니라 ‘오작동’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고장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습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계’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의 퍼포먼스는 ‘비작동적 퍼포먼스(in-operative performance)’라 규정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90분 동안 그가 들인 노력이 결국 ‘무위(無爲)로 돌아갔다’고 할지도 모르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퍼포먼스를 ‘무위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도(道)’와 무관하며, 그의 작업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일’하고 ‘작동’하는 ‘작품,’ 즉 work/werk/opera/opus의 범주를 미묘하게 벗어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그것은 그의 작업(work)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작동(properly work)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작업,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작동을 허물어버리는 작업(A work that does not work properly or, more precisely, unworks its own working)’으로서.


정금형, 〈만들기 쇼〉, 2021, 퍼포먼스 © 정금형

3. 매뉴얼 없는 튜토리얼

정금형 작업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그의 작업이 사실 ‘매뉴얼 없는 튜토리얼’이었다는 보다 근원적인 진단으로 우리를 이끈다. 튜토리얼이 대개 매뉴얼과 등치되거나 매뉴얼로 기능한다는 상식에서 보면 기이한 진술이지만, 막상 그의 튜토리얼을 그대로 따라 무엇을 만들려는 것이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목적 없는 (합)목적성 (Zweckmässigkeit ohne Zweck/purposiveness without purpose)’이라 규정했던 이 고전적인 특성은, 〈만들기 쇼〉가 90분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드러낸 미학적이고, 무엇보다 교육학적인 ‘공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는 또한, 대개 ‘인형극과 접목되었다’는 식으로 투박하게 기술되어온 ‘춤’과 안무의 요소가 실은 장치의 사용가능성과 사용불가능성의 간극에서 나온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모터로 작동되는 바퀴와 기계부품들의 조합에 달라 붙은 마네킨의 팔다리는 사실 전자의 기능에 별다른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무 쓸모가 없지만, 바로 이 과정에서 이들의 움직임은 “순수한 운동”, 즉 “춤”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환기했던 ‘꼭두각시와 인형의 차이’라는 문제, 즉 정금형의 작업 전체가 그 사이에서 진동해온 지평을 근본적으로 전경화한다. 지면의 한계상 보다 엄격하고 자세한 논의는 다른 자리를 빌어야 하겠지만, 핵심만 짚어두자면 꼭두각시놀음(puppetering)은 인형놀이가 작동시키는 애니미즘(animism)의 근원적 환상과 절연한다.

즉 인형이 살아있다거나 자기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는 듯 이뤄지는 인형놀이의 근본적 전제를, 꼭두각시 조종자(puppeteer)와 꼭두각시(puppet) 사이를 연결해주는 (비)가시적 실과 끈은 잘라내는 것이다.

이는 정금형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서 인형의 움직임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거”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의 몸을 “사물을 작동시키거나 이동시키기 위한 장치”로 규정하는 지점이나, “원격조정장치와 원격으로 조정되는 것 양자로 동시에 작동하는 로봇을 만들려고 노력해왔다”는 발언과도 그 중심에서 공명한다.

작가 자신과 그가 만들고 조종하는 대상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이 연결과 조립의 과정은 모든 부품들이 관객들 앞에 남김없이 노출된 상황 속에서 이뤄지지만, 궁극적으로 작가는 그 결과물이 정확하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작업한다는 이율배반의 퍼포먼스, 혹은 교육(학).

어디선가 작가는 ‘관객’이 사실은 “증인”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만들기 쇼〉가 일종의 ‘숙제(Aufgabe)’일뿐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어떤 교훈을 끄집어내고, 나아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학생(Schüler)’일지 모른다는 카프카 특유의 이중적인 관찰과 겹쳐 놓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호의존”의 관계가 있긴 하지만 결국 “기계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근원적 역설을 통해, 누가 누구의 꼭두각시인지에 대한 전제 자체가 의문시되는 지점 어딘가 서 있는, 숙제와 학생.


정금형, 〈만들기 쇼〉, 2021, 퍼포먼스 © 정금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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