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장난감, 유령들의 시간
그러나 조립 및 완성, 혹은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부품들의 진열, 재활과 망가짐 사이에서 진동하는 괴팍한(idiosyncrasy) 수집품들의 수장고로서 작업대/작업실의 실체를 전시장으로 옮겨 놓은 최근 전시들은 움직이는 인형과의 은밀한 파트너십, 섹슈얼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던 과거의 작업 양상과는 분명 또 다른 국면을 만들고 있다.
물론 정금형의 작업에서 전시의 포맷이 강화된 것은 작가의 순전한 의지라기보다 미술계의 더 잦은 호출, 그리고 동시대 미술관으로 넘어온 퍼포먼스의 다변화적 양태 속에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일 테다. 그녀의 작업이 이벤트성 공연에서 디스플레이 포맷으로 본격 전환한 기점은 아마도 2016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개인소장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전까지 라이브 퍼포먼스를 통해 마네킹, 진공청소기, 운동기구, 굴삭기 등을 동원하며 조종자와 조종하는 사물의 성애적인 관계를 다루던 정금형은 이 전시에서 자신의 다양한 인형과 도구들을 ‘수집과 소장’의 맥락으로 펼쳐 보였다.
이후 송은 아트센터에서의 《스파 앤 뷰티 서울》(2018)를 비롯해 이탈리아, 덴마크 등 유럽에서 가진 퍼포먼스 전시들,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치 조립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부품들처럼 작업대 위에서 조립되었거나 조립되기를 기다리는 로봇, 마네킹, 인형들의 해부된 사지와 장기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많은 공연이 취소되고 관객 대면 자체가 난관이 되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경유한 후, 아마도 그녀에게는 짧은 라이브 퍼포먼스로는 충당할 수 없는 시공적 과제가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즉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장시간 동안 (그녀 대신) 뭔가 자리해야 했을 것이다. 정금형의 작업은 갈수록 그녀의 진짜 신체, 혹은 그 신체와의 실제적인 상호작용보다 그녀를 대변하는 인형들, 파트너들이 증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 유사-신체들이 발산하는 시각적 힘과 잠재력에 대한 이야기로 이동하는 것 같다.
전시장을 점령한 그녀의 행위자/퍼포머들은 조립되기를, 움직이기를, 역할을 부여받기를 기다리는 기계들, 로봇들, 인형들, 분신들이다. 이제 정금형의 퍼포먼스 전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사물들의 배치와 영상이 담긴 모니터들이고, 이곳은 퍼포먼스의 현전성보다는 반복과 재활성화를 암시하는 유령적 시간성이 지배한다.
오늘날 미술관 안팎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 전시들은 공연 형식과 전시 형식이 혼종된 새로운 프로토콜을 장착하고 있다. 클레어 비숍에 따르면 2008년 이후 미술관에서 퍼포먼스의 부상은 극장의 ‘블랙박스’와 미술관의 ‘화이트큐브’가 융합된 ‘그레이박스’라는 새로운 시공과 관객성을 창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종성의 프로토콜로서 대두된 새로운 종류의 관람성과 현장성(liveness)은 사실 동시대 디지털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비숍이 주목한 그레이박스의 프로토콜 가운데 하나는 미술관에서 펼져지는 퍼포먼스가 이전과는 다른 시간 체제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미술관 퍼포먼스는 그 고유한 안무의 시간성—일시적이고 특정한 시퀀스들로 이루어지는 현장 이벤트—에서 더 공간적인 시간, 즉 자율적인 관람, 비동기화된 타이밍, 그리고 온전히 정적인 주의 집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전시의 시간성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전시의 시간성으로 이주한 퍼포먼스는 동시대 관람의 지각적 조건이라 할 디지털 기술과 감각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조각과 같이 포토제닉한 느린 움직임을 선보이거나, 관객이 어느 각도에서, 어느 장면을 마주하든 간에 소셜미디어에 올릴 수 있는 다채널 오페라의 상황을 연출하거나, 미술관의 운영시간에 맞춰 반복적인 ‘루프’를 구동시키며 퍼포머의 움직임 자체를 타이머에 동기화시키는 것이다.
설치미술가이자 안무가인 마리아 하사비(Maria Hassabi)가 그러한 루프 속에 작동시킨 자신의 퍼포머들을 ‘작은 기계들’이라고 묘사했듯이, 오늘날 미술관 퍼포먼스에서 퍼포머의 신체와 기계 사이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깝다.
정금형의 작업에서도 인체와 기계의 거리는 지극히 가깝고 그 관계는 자주 착종되기에 이르지만, 라이브 타임으로 펼쳐지는 정금형의 퍼포먼스는 여전히 안무적 시간성을 고집하고 있다.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인체는 오로지 그녀 자신의 몸이고(다른 퍼포머를 고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아플 수 있고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최근 국내에서는 그녀의 퍼포먼스를 아주 드물게만 만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퍼포먼스 전시들이 ‘작은 기계’들을 움직이며 전시장을 점령하고 있다면, 정금형의 퍼포먼스 전시는 기다리는 인형들의 시간으로 고요하게 루프되고 있다. 대신, 정금형이 직접 등장하고 수행하는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관객들에게 ‘관람’이 아닌 ‘목격’을 요청한다. 그녀는 공연을 보는 이들을 관객보다 ‘증인’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진술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증인들은(극장의 관객에 비하자면) 언제나 한정된 소수이며, 촬영이 금지되고 오롯이 자신의 눈과 귀로 그녀의 말과 몸짓에 집중해야 한다.
안무가이자 무용 이론가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에 따르면 오늘날 퍼포먼스의 관객은 ‘관중’과 ‘증인’으로 구분될 수 있다. 레페키 또한 동시대 퍼포먼스에서 증인을 요청하는데,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관중(spectator)’과 달리 증인은 퍼포먼스에서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체현하고 감정적으로 접촉하고 나름대로 번역하는 자이자 미래의 관객들에게 자신의 “주관적-육체적-정동적-역사”를 전달하는 매개자/매체이며, 나아가 퍼포먼스를 함께 책임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