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Korea Artist Prize 2021》 © MMCA

들어가며

여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긴급한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다. 긴급한 것은 다수의 목소리로 규합되고, 요청되면서 그 시급성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받는다. 때로는 당연, 긴급하기 때문에 중요해지기도 한다. 반면 중요한 것이 늘 긴급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탄생 이후 세간의 평가가 쌓여, 어느 시대에서든 훌륭하게 여김 받으며 재방문 되는 것이 자명한 작품을 일컬어 고전(classic)이라고 칭하는 것이라면, 예술에 관한 한 줄곧 중요시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수백 년이 지나도, 또한 중요성을 호명하고 요청하는 주체의 개별성 혹은 기호와는 별개로, 그저 중요하다. 예술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중요성을 차지해온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새로움이 분명하다. 새로움은 실험되고, 혹사당하고, 도전받고, 진부해졌다가, 다시금 부활하면서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예술에서의 새로움은 사회의 변혁, 문화의 발굴, 전통의 전복을 위해서 전략적으로 요구된 가치가 아니었다. 새로움 그 자체의 운동성은 새로움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움은 일종의 고전적 가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는 명제는 어떤 오만의 발로일까, 아니면 일종의 포기일까, 혹은 현학적 수사일 뿐일까? 예술이 새로움에 복무하기 위해서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움에 관한 극단적인 논의는 너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새로움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판단 주체의 경험과 앎에 의거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단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는 감각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주체인 ‘나’의 감각지가, 켜켜이 쌓인 다채로운 경험치만큼이나 낡은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을 암시한다.

또한 ‘나’는 기껏해야 100년을 살고, 알고자 해봐야 서기 2000여 년의 과거에 대한 완전한 앎이란 있을 수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고전이 될 만한 예술작품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만큼 예술가는, 특히나 감각에 대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가장 신뢰하는 동시에, 자신의 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오민은 자신의 앎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가면서, 자신의 앎에 대한 믿음을 0으로 돌려놓는 일을 서슴지 않는 드문 기질의 예술가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확장의 방향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만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회귀도 아니라는 점은 그가 구축하는 앎의 체계를 독특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에게는 모종의 사명감이 있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그 사명감에는 소위 ‘목적’이 없다. 목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사명감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때의 목적이란 행위가 행위 그 자체로부터 충족하고 충족되는 것 외에, 행위를 수단화하여 얻고자 하는, 행위 그 자체의 참된 기쁨과는 유리된 결과물을 일컫는다. 활동하는 인간, 그중에서도 예술가에게 있어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행위와 선택1은 그 자체로 대단히 의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들 행위의 동기와 과정, 추구하는 바와 지양하는 바를 궁금해한다.

이어지는 글은 예술가 오민의 예술관, 태도와 관점, 수행과 구성을 뒤쫓는다. 더불어 한 가지를 시도해본다. 오민의 개별 작품들 고유의 특이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일일이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작품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행위와 선택

“그래서 만약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들(prakton)’의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이것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라는 것이라면,
또 우리가 모든 것을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이 좋음이며, 최상의 좋음(ariston, 최고선)일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앎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큰 무게를 가지지 않겠는가?”
- 아리스토텔레스, 「제 1권, 제 2장 최고선과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2

오민은 줄곧 자신의 모국어를 음악 연주라고 말해왔다. 이 진술로는 작가가 모국어에 얼마만큼 능통한지, 과연 여전한 애정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모국어의 시원성이 내포하듯, 그에 따른 오랜 시간이 그 언어에 투여되어 있음을 짐작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이 시간은 아마도 연주자의 관점과 태도로 신체와 사유를 벼려온 과정이었을 것이다. 연주자의 관점이란 무엇일까? 화가의 태도, 조각가의 관점과 견주어 어떻게 다를까? 셋 모두에게서 수행이 일어난다는 점은 동일해 보인다.

다만 연주자의 수행의 결과로 발생한 소리는 ‘흘러가는’ 시간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즉 발생했다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다소 명징한 차이를 갖는다. 이는 마치 우주의 섭리와도 같은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발생했던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 즉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정면으로 맞이해야 하고, 불멸성을 억지로 꾸밀 수 없고, 가시화된 물질로 남길 수 없으며, 무한한 척할 수 없는 음악 연주의 세계관은 오민에게 주지할만한 질문을 남겼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간 오민은 “과연 미술에서 시간을 재료로 받아들인 것이 맞는지”를 질문해왔다. 미술의 역사와 시간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화두임이 분명한데도 이 질문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민이 이야기하는 미술에서의 시간은 요컨대 함축된 시간, 깊이로써 쌓인 시간, 드러나지 않는 시간, 비선형적인 시간, 흐르지 않는 시간, 안 들리는 시간 등의 ‘관념적 시간관’을 일컫는 듯하다. 이 시간관은 흥미로운 작품이 탄생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민은 시간의 가장 가혹한 실체, 1분 1초가 흘러가며 발생시키는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오민에게 ‘재료로서의 시간’은 무엇일까? 이 논의를 위해 우선 그가 정의하는 예술의 재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예술의 재료는 소위 전통적인 물질 재료들 외에도, 빛과 소리, 움직임 등의 비물질적인 재료로 확장되어왔다. 오민은 이에 덧붙여 “미술에서 재현을 다룰 때 긴밀하게 연관되어 온 사건, 역사, 문화 역시 재료에 포함된다.

이는 내용 혹은 주제 역시 재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형식 역시 재료가 될 수 있으며, 질문과 사유 또한 재료”라고 말한다. 심지어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재료를 대하는 태도 역시 재료 연구에 포함된다”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형식(form)’에 대해 오민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형식이란 확장된 재료들이 맺는 물리적, 관념적, 역사적 관계를 의미하며, 그 관계에 따라 결과적으로 만들어지는 관계 구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덧붙여 “형식은 사유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계기이며, 사유의 도구이자,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요컨대 오민에게 재료란 가시성을 기반으로 한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민의 재료는 복잡성과 순수성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수행자의 몸짓, 타인의 생각, 관객의 경험 등 통제할 수 없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영역까지를 재료로 삼는다. 이는 통제 불가능한 사건을 발생시킨 뒤, 그저 작품의 결과로 수용할 뿐이었던 기존 미술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오민에게 형식이란 조형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용을 담는 틀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내용은 곧 형식이며, 형식은 예술의 외관이나 소통 방식의 꾸밈이 아니라 예술의 근원적인 실체가 된다. 이때 예술가의 기예와 탐구, 행위와 선택은 비로소 재료, 형식, 구성, 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논의는 예술가의 자기 정립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 정립은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다. 완성 불가능의 특성은 예술의 발생 동력이자, 무구한 예술 지향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관계의 충분조건들

“의미의 위기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예술과
전해 내려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기록 명제들로 이루어진 체념적인 예술 사이의 경계선은
다음과 같은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T. W. 아도르노,『미학이론』3

가장 급진적인 정치에는 목적이 없다. 이는 재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는지에 관한 작가의 태도와도 직결된다. 오민은 종종 ‘감각재료 사이의 대등함’에 대해,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배경이 되지 않는 상태’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이때 ‘대등함’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대등함은 지위의 등급, 즉 위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다.

여러 재료를 동등하고, 동일하며, 공평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즉 아무런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고자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즉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결국 감각재료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고유 특질의 유효성 차원에서 독립성을 지닌다.

각각의 상호 인정과 깊은 이해만이 이 독립성을 와해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등함’은 총체적인 감각 상태에 관한 순수한 지향에의 충분조건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진정한 최고의 정치, 즉 목적 없는 행위가 행위 그 자체를 촘촘하게 포개고 있는 상태가 바로 ‘대등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급진적 관계 설정에 있어, 어떤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가? 오민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종속적인 관계, 필수적인 관계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하는 것 같다. “음악에서 소리는 필수적인가?”라는 질문은 과연 음악은 어떤 조건들로 정립되는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질문 방식은 여러 질문을 파생시킨다.

미술에서 이미지는 필수적인가? 사유에서 체계는 필수적인가? 결국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거의 모든 것에 제동을 거는 이 질문 방식은 경험을 구성하는 상식과 통념에 강력한 문제를 제기하며, 그 자체로 충분히 급진적인 예술 모델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민은 급진적인 제스처에 그치지 않는다.

확장된 재료 개념과 급진적 형식 개념을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예술로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즘의 전시장에서 ‘예술가’가 나열을 구성이라고 부르며 안주하고, 결합을 창조라고 일컬으며 만족하는 관성에 쉽게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역할이 실험되는 것과 호칭이 남용되는 것의 차이는 재료의 구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성은 합리성의 체계 안에서 재료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인 동시에, 수많은 변수를 받아들이는 복합적인 활동이다. 구성은 여러 확장된 재료들이 확장된 형식 안에서 맺는 모든 크고 작은 관념적/실질적 관계이자,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활동이다. 창작자와 재료 간의 멈추지 않는, 어디로 갈지 장담할 수 없는 운동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구성은 창작의 모든 선택 과정을 포괄하는 운동성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불확정적인 운동성의 총체인 예술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나는 벗겨지면서 반쯤 뒤집어져 안과
밖이 동시에 보이도록 말려있는 양말 한 켤레를 상상했다.
또한 분명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좌표상으로는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운동을 가정했다.
한편, 수많은 가지 중 어느 부분이 잘렸고 어느 부분이 잘리지 않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로 다듬어진 정원수를 떠올렸다. 안과 밖, 전과 후, 자연과 가공.
분명 양립하는 다른 두 가지가 굳이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단정하게 얽혀 있는 상태를 그려보았다.”
- 오민,『강진안, … 57스튜디오,』4

요즘 들어서 나는 문해력(literacy)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문해력은 언어라는 공통의 약속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에 근거한다. 때문에 세계를 인식하고 사고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때 언어는 문자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감각 정보들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자 혹은 감각 정보를 눈 뜨고 본다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보는 것을 사유하는 것, 들은 것을 이해 가능한 상태로 재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문해력은 곧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일인 셈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일과, 눈에 보이는 것을 발생시키는 이면의 것을 ‘보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후자는 생각의 다른 말이다. 물론 여기서의 ‘보기’는 세계와 나 사이의 살갗으로 밀려드는 진동 모두를 포괄하는 감각을 일컫는다. 그러니 시간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내러티브를 보는 일과 같다.

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시간은 그 자체로 내러티브다. 이때 아주 분명하고 완고한, 그와 동시에 미시적이고도 거대한 차이를 인식하게끔 의도된 것을, 구성된 내러티브로 본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의 특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가, 어떤 시간을, 어떻게 보는지를 결정짓는다.

내러티브의 창작과 이해에는 몇 가지 능력이 요구된다. 하나의 구성 안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하며, 기억과 상상을 동원해 전과 후,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연결시켜야 한다. 연결이 매끄러운 경우를 우리는 보통 전형적인 내러티브로 여긴다. 가령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제공하는 내러티브를 금세 이해한다.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발생과 반응이 충분히 예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지각, 인지, 감각, 사유, 지식, 상상 등 모든 것을 총동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민의 경우, 내러티브는 “시간의 수평적 구조와 그 흐름”을 의미하고, 텍스처는 “시간의 수직적 구조와 동시성”을 말한다. 오민의 작품을 보는 일은 이러한 내러티브와 텍스처의 덩어리를 하나의 공고한 세계로 맞닥뜨려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 ‘그저 있음’과, ‘보면서 있음’은 대단한 차이를 갖는다. 이 차이는 감각하는 개별 주체에 의존한다. 이때 보는 것은 곧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민이 줄곧 말해왔던 ‘동시성’은 현실에서 구성되고, 주체에게서 와해된다. 와해는 곧 재구성이다. 봤던 것을 기억하고, 볼 것을 예상하며,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꾸만 빠져나가는 그 모든 과정은 무한한 가짓수로 열려있다.
 

불가능한 완성과 열린 결정

“연습곡에는 ‘연습’과 ‘최종’ 두 가지 개념이 공존한다.”
-오민, 『에튀드』5

언젠가 오민은 “전시가 시작되어도 작업은 끝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작품의 완결을 결정하는 예술가의 판단에 관한 질문은 회화와 조각을 막론하고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작가는 어떻게 알게 되는가? 때때로 예술가는 ‘만족’과 ‘충분’으로 완성을 결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민에게 있어 ‘완성’은 일종의 ‘가변성’의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그에 앞서 오민이 자신의 ‘영상’ 작품을 ‘시간 기반 설치(time-based installation)’로 부르기로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상은 기본적으로 한정적인 지속시간(duration)을 전제로 한다. 필연적으로 특정한 시간을 구성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때 오민의 구성은 이미지의 배치에 치중해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이미지와 소리를 발생시키는 ‘움직임’과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니 매체의 넓은 구분 정도인 영상이라는 단어는 불충분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즉, ‘시간 기반 설치’의 등장은 구성의 내용이자 형식으로서의 시간이 전시장에서 매번 새로운 형태의 설치로 드러난다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작품이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설치라면, 자연스레 작품의 완성이란 공간에 배치된 시간 그 자체가 된다.

완성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는 ‘연습곡(étude)’으로 출발한 일련의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연습곡(étude)이란 연습을 위해 작곡된 간단한 악곡을 뜻한다. 연주자가 기술을 연습하기 위한 교본이자, 때로는 그것 자체로 높은 예술성을 지닌 완성된 연주곡이 되기도 한다. 작가에 따르면 연주자는 전체 악보에서 연주하기 어려운 부분을 따로 뽑아, 원곡과는 다른 템포, 리듬 또는 악센트로 연습한 다음, 원래의 연주 방식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 연습을 통해 음악가를 둘러싼 모든 감각, 인식, 몸, 소리가 변화하고 연주가 음악의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연습과 완성은 어떤 차이를 갖는가? 애초에 시간을 연습과 완성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시간은 결코 연습 되는 법 없이, 무한히 새롭게 완결된다.

우리는 매초의 완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거나, 이것이 ‘쌓여’ 어떤 완성에 가 닿기를 희망하지만, 이런 사고는 환영에 가깝다. 연습은 곧 다수의 완성이다. 달리 말해, 시간 기반 설치는 항구적인 완성의 가능성을 영원히 유보하면서 만들어내는 한시적 원본으로서의 완성인 것이다.

오민은 한 인터뷰에서 “시간은 얄궂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간은 발생시키고 사라지게 한다. 결국 지금-여기는 항구적으로 도달되자마자 도착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일컫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때 공연의 구성 혹은 수행의 순서나 방법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스코어는 과연 무엇을 완결시키고, 무엇을 가능하게 하며, 어떤 종류의 미완을 예고하게 될까? 스코어가 향후의 시간을 구성하는 내용과 형식을 미리 예비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원래의 질문을 교란시키고, 자꾸만 되돌아가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반추하게 하는 스코어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 스코어가 동일한 규칙을 지닌 악보라던가, 최대한 해석의 이탈이 없도록 고려된 지시문이라던가, 완벽하게 기록된 결정체가 아닌,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지금-여기의 구성 원리라면? 이쯤에서 오민의 질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완전 질문(question total)의 탁월성

질문은 답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 때 성립한다. 무언가에 질문이 생기는 때는 답을 기대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지만, 질문 그 자체로 생각을 팽창시키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니 좋은 질문이란 사유와 사유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오래도록 탐구하도록 지구력을 부여하는 도움닫기이자, 차이가 발생시키는 마찰을 열광적으로 즐기도록 만드는 부싯돌이다.

즉, 질문에는 오래전부터 의구심을 품어왔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갈증과, 부정확하지만 자신의 앎을 토대로 예견 해볼 법한 응답의 상태가 함께 들어있다. 더불어 좋은 질문은 그다음 질문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질문 역시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몇백 년을 버티며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있을까?

흥미롭게도 오민의 질문은 진보 혹은 발전의 메커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각각의 오민 작품이 갖고 있는 질문은 늘 현재형이다. 과거의 질문이 지금의 질문보다 뒤처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가 작품을 통해 길어 올린 질문 중에 해소되어 폐기된 질문은 없어 보인다. 각각의 작품은 재료의 선택, 관계의 배치, 수행의 종류 등에 따라 주요하게 제기하는 질문이 현격하게 달라지지만, 하나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 속 질문도 견주어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의 질문은 하나의 발생이 있기까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갈래를 낱낱이 사고한다. 공연예술 그 자체에서 발견 가능한 요소들에 대한 재고, 음악 공연과 무용 공연의 차이, 공연예술과 영상 작품의 창작의 차이에 대한 의문들로 구성되어 왔고, ‘시간 기반 설치’로 공연을 할 수 있는지 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련의 질문들은 파편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차이이자 반복으로서 완전하다.

그럼에도 근원을 재고하게 하는 오민의 질문은 우주의 탄생사라던가, 모종의 불가지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관계에 관한 그의 사고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따져 묻는 동시에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독립성을 통해 비로소 추상의 공간이 열린다.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행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는 이유는, 지금-여기를 둘러싼 온갖 변화 사이에서 주장하고, 투쟁하며, 논의하고, 탐구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변화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도출되는 사유에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의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질문’이라는 것을 30년 동안 생각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질문에 관해 어떤 개념을 얻게 될까? 우리는 무엇을 어디까지 사고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상세하게 고려할 수 있는가?

통합적인 인식과 상세한 발견은 서로를 지탱한다. 이미 충분한 밑줄을 그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펼쳐보면 새로 발견하게 되는 문장이 있는 책처럼, 오민의 작품을 볼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질문의 차이란 그 자체로 충분한 기쁨이 되고야 만다.
 

최고의 각성 상태

“내가 만든 영상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행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말 가만히만 앉아 있는 경우는 없다.
등장인물의 대부분은 훈련된 무용가이고 정교하게 짜인 스코어를 최고의 각성 상태로 수행 중이다.”
- 오민, 《오민: 초청자, 참석자, 부재자》(2020) 中

오민의 작품에서 무엇이 움직였는지, 누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움직이는 사물 혹은 수행하는 인물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될만한 또 다른 수행자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가능하다. 작가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것은 정교하게 짜여 있다. 그렇다면 오민의 작품에서 작가는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는가? 연주를 모국어로 삼는 오민은 스스로를 작품의 짜임 안에 삽입하는가 혹은 작품 외부에 놓는가?

영상과 공연을 오가는 오민의 작품에서 작가는 언제나 어떠한 종류의 수행 중이다. 그가 종종 예시를 들곤 하는 것처럼, 공연을 가장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관객은 아마도 그 공연을 만든 안무가 그 자신일 것이라는 추측과 마찬가지로, 오민의 작품을 가장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는 오민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저자로서 차이를 가장 섬세한 단위까지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며, 반복으로부터 비동일성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든 간에, 오민의 신체와 사유는 언제나 무수한 지금-여기를 오가며 도무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싱글 채널 작품이든, 두 개 이상의 채널을 가진 작품이든, 오민의 작품을 보는 경우의 수는 무한하게 증폭된다. 채널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채널로만 파악 가능한 일, 그 채널이 설치된 전시장의 상황까지 모든 요소는 매분, 매초 처음 발생하는 시간이 된다. 게다가 이때의 채널은 프로젝션의 채널과 사운드 채널로 다시 구분된다. 이것은 작품을 보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며, 더 상세하게는 경우에 따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요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그 누구도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작품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오민의 지금-여기를 독특한 위상으로 옮겨놓는다. 한편, 이미지를 보고 소리의 시각적 근원이나, 이야기를 파악하려 드는 습관은 작품을 보는 데 때때로 방해가 되기도 한다. 방향, 색, 포커스, 거리, 밸런스, 질감, 노이즈, 속도, 사운드, 순서, 패턴, 카운트, 제스처, 표정, 생각, 기억이 재료로서 구성된 작품에서 모두가 모든 것을 한 번에, 동시적으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여러 번 보고, 보기를 연습한다면 다르다. 이때 관객의 신체에 나름의 각성 상태가 요청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불가능성을 거스르는 훈련으로서의 보기는 작품의 독해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세계라는 시간의 총체 안에 새롭게 구성된 시간을 만드는 오민의 지금-여기에 접속하는 일은 꽤나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일단 접속을 시도하면, 다중의 지금-여기 중에서도 가장 긴급하고도 선명한 지금-여기가 ‘최고의 각성 상태’로 나를 여기에 있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결국 오민의 작품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진 시공간을 하나하나 다 써보기를 시도하거나, 그 시공간 자체를 덩어리째 옮겨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마저 품게 된다. 깨어있는 상태로 현존하는 경험은 이토록 다층적이고 강렬한 일이다.

 
나가며

1990년대를 변곡점으로 미술계는 새로움을 ‘주제’에 집중시켜왔다. 여러 시대적 테제와 세계적 이슈를 경유해오면서,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주요하게 ‘새로움’으로 명명되는 주제는 ‘정의로움, 옳음 혹은 평등함’에 관련된 요소들로 주목되는 것 같다. 여기서 위치 지을 수 있는 예술가의 애매한 입장은 몇 되지 않는다.

사회학적 화두를 예술가의 관점으로 가시화해 공개적인 고발자가 된다거나, 인류가 인간중심주의적인 면모를 반성하도록 종용한다거나, 조형화한 대상에 당대의 유행과도 같은 주제로 의미부여 하는 일에 심취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이제 3~4년 남짓 주기로 교체되는 ‘주제’는 예술가가 사유하는 재료라기보다, 지금 ‘유행하는 새로움’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을 얻는 도구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갸우뚱거리게 된다.

누군가의 신념은 어떻게 신뢰받는가? 어쨌든 예술가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살아있으며,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생존 시기와 함께 번성하기도, 예술가의 사후에 특별히 고려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진정한 야심은 당대에 있을 수 없다. 고전에 최소 100년의 시간이 필요한 만큼, 예술가의 질문은 지금-여기에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이 삼은 과제는 대체로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헌신적인 반응처럼 보인다.

예술가 고유의 질문은 타인이 인정할법한 질문으로 빠르게 대체되어 간다. 이제 역사를 비추어 예술의 존립이 가장 위태로워진 시기에 진입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가장 정치적이며, 긴급한 지금-여기는 바로 이 시대가 누락하고 있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 지금-여기가 아니겠는가? 오민의 다음 질문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 같다.


1 “모든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제 1권, 제 1장 좋음과 목적」,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김재홍, 이창우 옮김(서울: 도서출판 길, 2011), 13.
2 같은 책, 14.
3 T. W. 아도르노,『미학이론』, 홍승용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1997), 245.
4 오민, 김성완, 신예슬, 『강진안, 공연화, 김민정, 김성완, 배기태, 슬기와 민, 신예슬, 신진영, 심우섭, 오민, 옥상훈, 이민성, 이신실, 이양희, 이영우, 이태훈, 이혜원, 장태순, 정광준, 조세프 풍상, 한문경, 허윤경, 홍성진, 홍초선, 57스튜디오,』(서울: 스펙터 프레스, 2019).
5 오민, 장지혜, 『에튀드』(서울: 스펙터 프레스, 2018).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