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눈물을 흘리는 영화는 제국과 자본의 최소한 예의다.
길이 사라진 앞산은 어둡다.
마을 앞 가로등 불빛은 얼마나 밤 새워 공허한가."
-김용택, 「좀비들」 중에서

오늘날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곧 삶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바꿔도 될 듯하다. 이 물음은 인간의 의지와 그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또 그 삶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물어보자.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러하듯, 예술의 현실도 ‘길이 사라진 앞산’처럼 어둡다. 단지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자비할 정도로 미래를 예측하고 설정하는 기획시대의 잔혹성 때문이다.

너무도 투명한 예술의 미래는 신기루와 같다. 현실이 불안정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감추기라도 하듯 권력은 일회성의 시대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가 가능하다고 외치고 또 외친다. 그래도 신기루는 걷히지 않고 대신 거대자본이 만들어낸 환상세계에서 자족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술의 죽음이 눈앞에 닥치게 된 것은 예술이 현실을 닮아가면서부터가 아니라 문화제도가 예술을 신자유주의 경제학 논리에 따라 측량하면서부터일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볼 때 예술은 모든 제도와 인습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의지와 같았다. 그것은 도피라기보다 새로운 생성을 위한 도전의 의미가 더 컸다.

그렇다면 영광을 위한 상처뿐인 몸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이 불안정적인 현실을 바꿔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현실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야 할까? 이렇듯 불확실성의 시대를 두고 니콜라 부리요는 인간과 산물 모두 탄생부터 기록되는 시대에 미술만의 특별함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미술가는 기호들을 활성화한다.”

그에 따르면, 동시대인 누구나 사진을 통해 소유하고 싶은 대상을 기록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록에 의하여 기억이 고정되는 반면 미술가들은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한다. 이는 동시대 미술이 현실의 불안정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모든 가치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에 예술이야말로 불변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상투적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지 않겠는가.

오늘의 미술은 현실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현실 속으로 침투하여 예술적 태도가 현실에 개입을 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닮은 가상세계로의 도피를 하던 말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건너온 오늘의 미술은 현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마법적 리얼리즘을 불러오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새롭게 해석하든 말이다. 실제로 21세기의 미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 과거를 호출하고 이를 전유하여 사유의 다양한 결을 만들어낸다.

무진형제의 작업은 특히나 더 보통의 삶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끌어온 경험과 소재를 토대로 제작된 영상은 대개 현실과 허구 사이 어디쯤을 배회하고,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신체를 통하여 점점 탈현실화 되어가는 동시대를 비유한다. 이 신체는 인간과 비인간의 중간쯤의 모습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여기서 비인간은 괴물의 은유일 수도 있고 기계화된 인간의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무진형제의 작업은 정신과 물질이 모두 빈곤해진 현실로부터 실존주의적 세계관이 투영된 허구를 관통하는 행위와 자본과 기술로 빚어진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신체를 구성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이렇게 그들은 현실과 예술, 체험과 퍼포먼스, 실재와 가상을 가로지른다.


무진형제, 〈결구〉, 2015, 단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11분 41초 © 무진형제

불면의 꿈

“그것은 오직 밤하고만 어울리는 불면, 그리고 소진의 문제인 불면의 꿈이다.” 

〈결구〉(2015)에 등장하는 M은 좁은 터널의 청소부다. 그/녀는 불결한 것들 덕분에 생존하는 인물이다. 한편 문명의 역사는 배설물, 오염물, 먼지 등을 현실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점멸시키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오점은 없어야 하며 멸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른바 성공의 기표가 된다. M이라는 인물은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고 오직 신체만이 허락된 인물이다. 그/녀는 무진형제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이지만 역설적으로 현재를 가장 잘 나타내는 좀비에 가까워보인다.

좀비는 일반적으로 서구 자본주의를 식인풍습인 카니발리즘(cannibalism)으로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비란 소비를 위한 소비로 치닫는 시장자본주의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한편 좀비의 탄생을 탐욕스러운 자본가에 비유하는 것과 달리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이를 전복하려는 문화적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좀비 영화의 원형을 보여준 조지 로메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문명, 즉, 미디어와 종교, 심지어 제도화된 가족제도나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협한 태도 등에 대한 비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M은 후자에 더 가깝다. 〈결구〉 속 인물은 도시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더 이상 세계를 확장시키지 못하는 청춘의 모습을 닮았다. 좁은 터널을 청소하는 M은 청소 전후가 거의 차이가 없는 터널 안에서 변화가 없는 과거와 현재를 기록한다.

그러다 갑자기 암전 상태에서 현실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녀가 도달한 곳은 실제 건물 청소부가 머무는 공간이다. 생활의 온기가 하나도 없는 이곳에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들이 배치되어있다. 마른 꽃다발, 은박발포지, 달력, 동물 형상의 금속 조형물 등은 어긋난 기호들이다. 명명할 수 없는 이 사물들은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 기호는 무기력하게 화면에서 미끄러진다. M은 다시 터널로 돌아간다. 연기자/수행자 M은 그 어떤 감정도 표출하지 않는다.

주어진 동선에 맞추어 이동하고 행동한다. 더러운 것을 불편해하지도 않고 장기를 연상시키는 물질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매뉴얼에 맞춰 기록한 후 서서히 전진한다. 그/녀는 막다른 통로에 갇혀 있다.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오로지 전진하고 우회한 후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뿐. 배회가 허락된 세대, 그것은 머물지 못하는 삶을 강조하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구〉를 현실의 비유로만 해석할 수 없다. 〈결구〉는 희망의 불씨가 사라진 시대의 증상을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겪는 청춘을 그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비관적인 미래를 재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진형제는 남아있는 마지막 희망의 기운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출구를 찾고자 한다. 마치 해녀가 산소를 끝까지 소비한 후 수면 위로 솟아오르듯 그들은 아직 남아있는 가능한 것들을 소진함으로써 이후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들뢰즈는 카프카와 베케트의 예술을 두고 잠들지 못한 채 꿈을 꾸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말했다. 카프카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가능한 것으로 부풀려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허구를 만들고, 베케트는 그나마 가능했던 것들을 꿈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오드라덱〉은 카프카 단편소설 「가장(家狀)의 근심」 속 신비의 존재/비존재인 오드라덱을 소설에 묘사된 대로 제작한 후 이 오브제/생명체를 끌고 밤 한가운데를 지나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이다.

소설은 '오드라덱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슬라브어다', '아니다 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은 독일어'라는 각기 다른 주장을 기술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을 인용해 오드라덱은 기관과 다름없는 리비도라고 설명한다. 신체 없는 “죽지 않는” 기관으로. 그러니까 라캉의 해석에 기대어 보면 오드라덱은 아버지 자신이라기보다 아버지의 고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좀비의 개념과 유사하게 오드라덱은 죽지 않은 채 떠돌아다닌다. 그 고민이 현실적인 것인지 형이상학적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미루어 짐작컨대 카프카의 실존적 물음에 가까울 듯하다. 오드라덱의 방황은 우리가 인간으로 스스로를 해방하며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신체 없는 본능이라는 기관만을 유지한 채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변신』을 비롯한 카프카의 소설 전반에 걸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무진형제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 마치 주사위를 던지듯 불확실한 비인칭의 존재를 툭 던져 놓는다.


무진형제, 〈풍경(風經)〉, 2016, 단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0분 57초 © 무진형제

현실에 구멍 내기

문학이 언어의 한계 안에서 언어를 넘어서려는 의지라면 시각예술은 언어 바깥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소설이 현실을 묘사하되 실제 현실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지만 현대미술은 지속적으로 현실과 관계를 맺었다. 무진형제는 다양한 미술 매체의 가장자리에 문학적 상상력을 겹쳐 현실과 비현실, 시각과 언어적 질감, 신체와 노동의 접점을 찾고 있다.

그들의 작업은 글쓰기, 그리기, 만들기, 기록하기, 편집하기의 과정이 곱해지고 나눠지면서 이루어진다. 현실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지만 현실은 각색되고 괴물화된다. 여기서 이름 없는 존재는 타의에 의하여 괴물로 변신되지만 결코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반면 괴물을 만드는 권력도 스스로 괴물이 된다. 그들은 타자의 초라한 찌꺼기를 먹고 살을 찌운다. 권력이라는 새디스트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부조리는 현실을 표상한다.

〈풍경(風經)〉은 〈오드라덱〉과 〈결구〉를 느슨하지만 정서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 작업들은 서로 물음과 답을 교환하며 전체를 위한 일부이자 일부로서 이미 전체를 구성한다. 〈풍경〉에서는 잃어버린 세계에 갇힌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만든 세계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쉼 없이 몸을 움직인다. 슬프게도 아이들의 아버지도 유사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잃어버린 세계의 아이들은 벽 너머에서 전달하는 메시지가 유일한 소통의 창구이다. 그것조차 일방적이지만.

〈풍경〉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슬픈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이야기는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고 과거를 향하고 도래할 미래의 불안도 더불어 성장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갑충이 자신의 일상을 바꿀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이 처한 상황만을 목격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운명의 고리를 자를 힘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또 다른 구원자를 기다려야 하나?

아직까지 고도(Godot)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새로운 문장을 만들고 기존의 문법을 재배치하고 버려진 낱말을 수집하고 부서진 의미를 되찾고 사라진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행위는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행위가 예술이 정해진 운명의 굴레에 빠진 현실 속에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는 모더니즘과 같이 과거를 완전히 분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구경꾼으로 세상을 관람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무진형제는 폐허 속에서도 어떤 가능성을 뒤져야만 했다.

〈더미〉(2015)는 재개발이라는 사건을 예방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끝난 사건 현장 안에서 마지막 남은 잔해들을 재배열하려는 비이성적인 행동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것들을 끝까지 소진시키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그것은 게임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시적 선언’일 테니까.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