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From Scenery》 © Space Willing N Dealing

1. 형상을 그리다.

한성우가 ‘보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었다. 어쩌면 소소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당시의 그에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역할을 해 주었던 것 같다. 그가 이미지가 없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혼란스러워졌을 때 그의 어머니가 던진 한마디로 본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 지점은 아마도 ‘보는 일’에 대한 우연한 경험이 때론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보이는 것과 그에게만 보여지는 것이 차이를 의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경험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을 보는가?’ 바로 매우 가까운 물음이다. 왜냐하면 되물음으로 순환하는 것이 그의 최근 작업에서 보이는 그리기 같기 때문이다.

그는 그려한 반문을 되풀이하는 시기에 그에게 다가온 사물이자 풍경인 냉각탑을 그렸다.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에서의 냉각탑은 그가 바라보는 순간에 그의 응시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라깡이 재현의 상이란 바라봄과 보여짐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긴다고 하였듯이 냉각탑을 자기동화적인 대상으로 재현하고 있는 느낌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리고 즉시 나는 그림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차단된 장소이거나 소외된 장소, 지속되는 시끄러운 소음, 냉각탑의 환기팬들이 뿜어 내는 열기와 같은 것들이 인지되는 상황이다.

그는 〈냉각탑, 193.9x259.1cm, 2012〉에서와 같이 하늘의 시야가 벽에 의해 막혀 있는 공간이나 〈냉각탑, 130.3x193.9cm, 2013〉에서와 같이 협소한 장소에 냉각탑이 갇혀있는 공간의 풍경을 연출하여 답답하고 막막하고 불편하게 그림에서 상황을 파악하게 만든다.

그림이 획득한 이러한 시각적인 느낌은 그림에서의 강조된 음영대비를 후끈한 열기로, 그리고 그가 초반 작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회화적 행위의 우연한 흔적들을 시끄럽고 멈추지 않는 부담스러운 소음으로 지시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각성이 이미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시선의 동선과 심리를 따라 다른 감각으로 이행하는 것이고 일종의 변형이다.


2. 이미지와 우연한 흔적

그의 작업을 처음 보았던 것은 2011년이었다. 그는 세계건축도집에서 본 서양의 고대와 중세시대의 건축물에 현혹되어 그린 드로잉을 보여 주었다. 건축물의 전체적인 모습과 기둥, 그리고 외형에서 보여지는 장식을 그렸던 드로잉에서 볼펜이나 사인펜으로 만들어 놓은 선들의 위엄과 뭉침은 표현으로 부족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건축물의 형태를 따라 흐르기도 하고 비껴나가기도 하는 선들은 식별할 수 있는 형상을 만들다가 손의 움직임을 가시화시키면서 화면 속의 이미지는 점차 상을 잃어간 듯한 느낌으로 보였다. 이는 마치 그가 그리려고 하는 대상을 재현하기 위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종이 위에 드로잉 되어 있는 선들에 대응하면서 다시 드로잉 해나가는 직관적인 감각을 그려 놓은듯했다.

이어지는 회화 작업들에서도 그는 일관적이었다. 무작위로 집적된 건축물들의 공간을 그리려고 하였다더라도 그는 정작 그리고 했던 이미지보다도 그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취한 행위에서 발생하는 흔적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고대와 중세의 서양건축과 함께 바로 자신의 집 앞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이나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 볼 법한 건축물들이 겹쳐져 쌓여지거나 허물어지는 건축물들의 뭉치를 그린 〈무제- 죽밥〉과 〈무제, 2011〉에서 그는 시공간을 초월한 이미지를 구성하여 어느 정도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야기시키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드로잉에서와 같이 운용된 붓질이 두텁게 발라진 물감 위에서 미끄러지고 거칠게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붓질 자국에 구성된 캔버스 표면 위의 이미지는 함몰된다.

이는 오히려 이미지를 관통하며 새롭게 구성되고 감정의 환기를 보다 자극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운용된 붓질의 흔적은 그가 그리려 했던 것에 더 근접한 유사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해 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리려고 했던 것을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던 방법으로 그려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무제- 죽방〉과 〈무제, 2011〉 작업 이후 한성우에게 두 가지 큰 변화가 보인다. 우선은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던 건축물의 형상이 제거되었다. 여전히 집적된 공간은 암시되고 있지만 건축물들의 구조나 구성된 이미지보다는 캔버스 표면 위에 물감의 물질감만이 드러나는 면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른 변화는 이러한 추상적인 접근에도 불구하고 점점 공간의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장소나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는 건축물을 대체한 면들 위에 이전의 작업보다 다양하게 붓을 운용하는 기법을 비롯한 긁어내기와 같은 다양한 회화적 행위들을 시도하여 물감의 물질감을 구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 무엇을 따라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그리기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여건으로서의 구체적인 형상이 제거된 화면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움으로부터 그는 그리면서 발생하는 행위의 흔적을 이전 작업보다 확장시켜 개연적인 표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절대적으로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러한 표현의 근간에는 그가 여전히 건축물의 집적된 공간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의식이 남아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2012년에 그린 〈무제〉 작업들에서 그는 청회색, 미색, 녹회색의 색조로 그림의 전체 화면을 채웠다.

이 작업들에서 건축물의 시멘트 벽, 페인트가 칠해진 벽이 꽤나 구체적으로 연상되는 색조는, 그림에서 회화적 행위가 만든 흔적인 물감의 물질감을 울퉁불퉁하고 거친 벽의 질감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게 만들고 집적된 면들의 구성 역시 서울의 금호동이나 면목동에서 볼 수 있는 상당히 사실적인 풍경으로 연상시킨다. 이렇듯 재현적인 이미지가 없는 그림에서 그려진 모든 것들을 실재적인 감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특징은 추상이라기 보다는 캔버스 표면을 구성적으로 만든다.

그는 이번 《풍경-그리기 From Scenery》 전시에 소개하는 최근 그림들에서도 회화적 행위의 흔적을 캔버스 표면 위로 드러낸다. 변화한 것은 이전 작업과는 달리 냉각탑이나 교내 풍경을 재현된 이미지로 그려나가는 부분이다. 풍경의 대상색을 빛 바랜 듯이 사용하지만 그 변형은 그다지 크지 않고 그가 풍경을 바라볼 때 위치한 시점이 드러나 있어 실재하는 풍경을 대면하는 느낌이 강조된다. 그러나 그는 풍경의 질감을 재현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본 풍경〉에서 건축물이나 계단의 구조, 풍경의 공간성, 풍경의 색채들은 묘사적이지만 풍경 속에 보이는 벽이나 바닥, 창문, 나무 등의 질감은 묘사와 상관없이 여러 번 색이 칠해져 거칠게 그 물감의 층들로 전체적인 그림 표면 위에 드러난다. 그 위에 직선이나 동적인 붓질이 다시 또 여러 층으로 그어지거나 남겨지면서 그리기 동안의 과정과 행위들이 보이는 흔적들이 만드는 질감에 풍경을 대면했을 때 발생했던 감정이 투사된다. 여기서 이 흔적들은 질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여 언급한 〈우연한 표시〉 들일 것이다.

“형상에 어떤 기회를 주기 위하여 그려진 이미지 안에서 〈자유로운 표시들〉을 아주 빨리 해야 할 것이다. 이 때의 형상은 비가망성 그 자체이다. 이 표시들은 느닷없는 사고적인 것이고, 〈우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연〉 이라는 동일한 단어가 가망성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전의 가망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선택과 행동을 지적한다는 것을 안다. 이 표시들은 전혀 재현적이 아니다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이것들이 우연한 행위에 의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관계되는 것을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표시들은 화가의 손과 관계할 따름이다.”(1)

한성우는 풍경을 보여진 그대로 재현했다기 보다는 자신으로부터 표현되는 현상적인 상태를 심리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눈에서 읽혀진 것을 즉시 손으로 이행하는 본능적인 감각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다시 말해서 화면을 구성할 때 이미지가 들고 나는 것 보다 물감으로 구성되는 회화적인 행위의 효과로써 또 다시 재창조해 나가는 그리기 과정이 어쩌면 그가 의지하려 했던 그 자신이 바라보고자 했던 풍경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풍경을 단순히 재현하려는 이미지로 선택하고 그려 나가는 이상, 타자의 이해까지도 아우르는 이미지의 서술성을 그는 그의 타블로 안에서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그가 얼마만큼 고려했었는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1).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민음사, 1995, pp 132-133,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