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r image of 《Vexations》 © ONE AND J. GALLERY

이번 한진 작가의 개인전 《벡사시옹(Vexations)》은 같은 제목의 에릭 사티(Erik Satie)의 피아노 연주곡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이곡의 악보는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연주자는 마디의 구분도 없는 이 곡을 악상기호에 따라 ‘매우 느리게’ 840번을 연속하여 연주하여야 하고, 이 곡을 연주하는 데에는 약 18 시간이 넘게 걸린다.

연주하는 것이든 연주를 듣는 것이든, 18시간 이상 반복되는 시간에 갇힌다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시간과 공간은 청중과 연주자에 의한 여러 소리가 섞여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리고 사티는 ‘괴롭힘’이라는 의미의 벡사시옹(Vexations)을 제목으로 붙였다. 

어쩌면 폭력적이기까지 한 이곡의 제목을 전시의 제목으로 가져온 것은 대상과 맞닥뜨려지는 순간이 ‘사건’이라 부를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조용히 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문득 떠오르는 것이며, 결코 잊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들뢰즈가 이야기했던 사유가 발생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사유는 의지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닌, 문득 사고(事故)처럼 닥쳐오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철저한 수동성을 요청하며, 그것으로 인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오래도록 바라본 풍경을 통해 작가가 경험한 것은 대상을 바라보고 소유함이라기 보다 대상의 리듬과 자신의 신체의 리듬이 일시적으로 공동의 장에 놓여있음의 발견이다. 


Han Jin, Vexations No.3, 2021, Gouache and pencil on cotton paper, 36 x 28 cm © Han Jin

에릭 사티의 곡 악보에는 “840번 반복하여 매우 느리게 연주하라, 사전에 최대한의 침묵 속에서 진지한 부동성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쓰여있는데, 이는 속도와 리듬을 지시하기 위한 악상 기호이기 보다는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어내는 태도에 관한 지시로 들린다. “아주 느리게 한 음, 한 음을 짚어내며, 그 음이 어떤 울림을 갖고 있는지 사유하라, 그리고 다음 음을 위해 조용히 집중하여 대비하라.”

한진 작가에게 ‘회화’란 자신에게 찾아 온 풍경에서 발견한 리듬을 자신의 몸에 새겨 반복하여 그려내는 것이며, 아주 느리게 질료와 그것들의 마찰을 받아들이면서 그 다음에 올 것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시에서 작가는 이러한 그림에 대한 태도를 3차원의 공간에서 역시 펼쳐낸다.

전시장에서 작가는 자신의 드로잉과 영상, 그리고 벽 드로잉을 선보이는데, 이것들은 작가가 ‘시간이라는 공간’과 ‘물리적인 공간’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음(音)을 다시 오래도록 응시한 결과로서 나타난다. 작가는 작품과 관객의 움직임,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시각적 장면으로 떠올라 완주(完奏)될 수 있도록 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