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빙》 전시전경 © 갤러리조선

‘회소’라는 단어는 한자 표기에 따라 두 개의 다른 뜻을 지닌다. ‘회소(回蘇)’는 거의 죽어가다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가리키며, ‘회소(繪素)’라 쓰면, 그림을 뜻한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큰 상실감의 흔적을 기꺼이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응집시켜 그림으로 다시 삶의 자리를 내어주기. 작가 한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만들어놓은 회소의 길을 따라 작은 기록(書)을 덧붙인다.

최근 몇 해에 걸쳐 선보인 한진의 개인전 《아득한 울림》(2015), 《White Noise》(2016), 《흑빙(Black Ice)》(2018)을 통해, 가장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하다 멈추고, 손에 잡힐 듯 다가오다 이내 곧 떠나는 소리처럼, 위태롭지만 사라지지 않는 작가의 잔향(殘響)을 볼 수 있었다.

한진 스스로 밝혔듯, 그녀는 단순히 시각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 대상과 공간에 의해 발생하는 소리, 그 소리가 만들어낸 연상의 마주침을 담아 온몸으로 그린다. 그것은 캔버스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의 내면에 깃든 소리에 스스로 반응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음악가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듣는 것과 연주하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듣는 행위가 일어나는 정확한 시점은 언제인가? 다시 말해 연주자는 지금 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연주하게 될 음악을 앞당겨서 머릿속에서 듣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 역시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직관에 기대어 답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내가 연주하고 있고 그러면서 이제 막 연주하려는 음악을 거의 들을 수 있는 상태다. 그렇게 되면 연주가 머릿속의 그 이미지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실체를 뒤따르는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에 앞서는 그림자인 셈이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이외에도 무수한 소리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청자(聽者)가 마주한 공간, 심리적 상태에 따라 소리는 선택적으로 다가온다. 필립 글래스가 말한 실체에 앞선 그림자라는 것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으나 ‘고스란한 그 무엇’으로 전해지는 감각의 지속성이 발현(發現)된 자리가 아닐까. 이번 전시 제목인 《흑빙(Black Ice)》은 한진의 작업 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이자, 그 세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억은 왜곡되고 희석될 가능성이 내포되어있으며, 그것을 소환하는 시점에 의해 기억의 형상은 달라질 수 있다. 한진은 강렬하게 들러붙은 기억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묶어두기보다, 서서히, 그렇지만 자신이 마주하는 매 순간의 미끄러짐과 안착하지 못한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때문에 그녀의 그림 속 요소들은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가지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적으로 캔버스 안에서 연주되고 있다.

이것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집중적으로 들었던 찰스 아이브스(Charles Edward Ives)의 음악과 닮아있다. 미국 현대 음악가인 찰스 아이브스는 무조성(無調性), 다조성(多調性), 우연 음악 등을 실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은 두 개 이상의 선율 혹은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곡이 상당히 많다.
 
“아이브스의 음악이 특이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음악의 사회적 측면에서든, 자연적 측면에서든, 친숙한 곡조에 관련시켜 볼 때 고유한 것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이브스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어떤 신비한 것이 있다. 그것이 내 책에 씌어 있는 내용이다. 즉 나는 그것을 진흙, 음악적 진흙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나에게 이 풍요로운 진흙으로부터 한 사람이 아닌 사회 여러 사람의 존재를 암시하는 그 무엇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흙이 있는 까닭에 그의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작품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당신도 분명히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한다 해도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당신 자신의 모양으로 듣는 경험을 하기 위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방식으로 그 경험을 완성해야만 한다.”
 
아이브스의 곡과 동명인 드로잉 작업 〈Tone Roads #1〉(2016), 〈Tone Roads #2〉(2017), 〈Tone Roads #3〉(2018)을 통해, 한진은 음악에서 말하는 ‘Tone’ 즉, 음색(音色)을 시각 언어로 전환하는 것에 몰두했다. 작가가 다른 색을 거두고 오로지 연필만을 사용해 Tone을 실험하고자 했을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색 대신 종이의 차이를 선택했다. 판화지부터 닥나무 종이까지, 각각의 두께와 질감에 따라 종이는 작가가 결정한 Tone을 받아들이고, 떠올랐다가, 스며들었다.

이것은 아이브스가 가진 ‘음악적 진흙’처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각각의 ‘고유성’을 지닌다. 때문에 소리의 길(Tone Roads)을 따라 만나는 바람, 돌, 향기, 슬픔, 상실, 고독은 하나의 선(line)과 하나의 Tone으로 요약되거나 압축될 수 없다. 각자 자신의 자리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한진의 진흙’이라 말하고 싶다. 그 ‘진흙’은 작품의 ’고유성’을 가리키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한진은 자신의 기억 속 풍경과 현재 마주한 상황 사이에서 쉬이 마침표를 찍지 않고, 오롯이 그 시간을 감내하고 분투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의심과 불안은 시선의 운동감으로 화면에 펼쳐진다.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잔잔한 바다가 아닌, 자신을 삼킬 듯 달려드는 발아래의 파도(〈해안선 Shorelines #2〉(2017-2018)), 고요한 밤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기억의 흔적(‘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슬퍼했었네 Was in Sorrow in a Soft Air’ 시리즈(2017~2018))에서, 우리는 작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한진은 수평선과 지평선을 기준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욱 가까이 동시에 멀리 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눈앞에 달려든 바람의 흔들림에 집중했다면(‘바람의 노래 The Song of the Wind’ 시리즈(2012~2014)), 최근작 〈바람의 안쪽 Inner Side of the Wind〉(2017)에서는 하나의 시선이 더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본 풀들의 거센 흔들림, 풀들을 헤치고 들어서자 순식간에 찾아드는 고요한 내부의 세계.

운동은 시선뿐만 아니라 소리에도 적용된다.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바람이 자신을 꽉 껴안는 순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바람은 침묵을 부르기도 한다. 침묵은 상실의 감각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현재를 뚜렷이 인식하게 만든다. 자신의 곁을 떠나간 존재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숨을 참는 시간. 기다림. 다시 마주하며, 기다림.
 
8세기 초에 쓰인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전체 분량에서 앞뒤가 소실되어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문장의 구성은 대개 이런 식이다.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다.” 언뜻 매우 명료한 문장 구성처럼 보이지만, 약본(略本)인 까닭에 학자마다 해석이 제각기 다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는 단테의 신곡을 여러 버전의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읽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왕오천축국전』을 붙들고 있는 학자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혜초 그 자신보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수없이 맴돌며 이미 주어진 길 위에서 방향을 잃다가도 또다시 단어를 길어 올려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한진 또한 하나의 원전(原典) 앞에서, 설사 자신의 기억과 경험일지라도 쉽게 캔버스로 옮기지 않는다. 한 언어가 또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확신 대신 언어의 이동에서 발생한 호흡을 살피고, 붙잡기보다 마음을 내어주며 자신의 그림이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는지’ 계속해서 더듬고 있다.

작가는 아이브스의 음악에 빗대어 자신의 작업 과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절뚝, 절뚝, 쉽고 빠르게 나아가지는 않으나,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으면서.” 한진은 그렇게, 있다. 어쩌면 ‘낮도 밤도 없는 곳’을 향해.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