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사시옹》 전시전경 © 원앤제이 갤러리

† 벡사시옹
 
한진 작가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작업의 부분들을 참을성 있게 여러 번, 더 적합한 예시와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설명해주곤 했다. 작가에게 언어란 불충분한 것이면서도 이미지로 근접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것, 도취에 빠지지 않고 사유로 전이시키기 위한 것, 그리하여 타자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창구였다. 작가는 언어가 그려내는 상(象)과 자신이 본 이미지를 최대한 가깝게 일치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작가의 이런 모습은 그의 작업에서도 찾아진다.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묘사하고자 고심하듯이, 자신이 옮겨 내는 회화가 자신의 본 풍경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작가는 정확한 색과 표현, 운동성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한다. 작년부터 준비하기 시작한 개인전 《벡사시옹》을 위해 작가는 올해 중반까지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으며, 지난 5월 말쯤에서야 드디어 그림을 지우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림을 지우지 않았던 다음 날, 작가는 흥분된 목소리로 에릭 사티 (Erik Satie, 1866~1925)의 『벡사시옹(Vexations)』을 설명해주었다.

“840번 동안 같은 연주를 반복하는거야. 연주하는 데에는 18시간 이상이 걸리고. 관객들은 장소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이 허락되고 연주자가 교체되기도 하고. 연주자들은 연주한 횟수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840장의 악보를 준비해서 한 번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악보를 한 장씩 던져가며 연주하기도 하고. 그래서 벡사시옹의 연주회는 ‘연주가 어떠했다’는 이야기보다 ‘공연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다’는 내용이 화제가 돼.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가 더 중요한 거지.”

나는 『벡사시옹』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려지는 장면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반복되는 지루함과 그로 인한 고통. 그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모든 감각과 감정이 아득해지고 나의 신체가 공기 속으로 분해되어 흡수되는 듯한 느낌이 들것이다. 장시간의 명상을 통해 감각되는 것과 유사하다. 감정도, 생각도, 고통도 모두 지나간 후, 모든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열린 감각을 맞이하는 순간.

작가는 이에 덧붙여 연주자의 감정적인, 또는 신체적인 변수, 그리고 타자(청중)에 의한 변수로 인해 연주가 현장을 장악할 수 없게 되고, 그로써 생성된 당김과 미끄러짐의 시차 사이로 ‘지금, 여기’가 감각되는 순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잊는 것으로서의 ‘무아(無我)’가 아닌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사라진, 행함과 당함이 동시에 일어나는 찰나이다. 그 순간 ‘나-너’는 서로를 ‘감지한-된’다. 
 
“뭔가가 느려졌다. 내가 파열 면을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나는 점점 더 확신을 느꼈다. 해답에 대한? 인식에 대한? 발견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는? 궁극의 그 무엇을? 멀리 산능선의 파열 면은 어느덧 내 안에서 서서히 자리 잡았고, 중심축이 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마치 나 자신이 두 바위층 사이에 눌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만약 내게 일어난 일이라면, 열려 있음이었다. 만약 일어난 일이라면, 하나의 호흡이었다(그리고 금세 다시 잊힐 수 있었다).”
 
그것은 대상과 마주한 호흡이다. 
 

‡ 리듬의 재현, 리듬의 번역
 
작가는 자신이 본 것을 회화로 표현할 때 악상기호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대상을 리듬과 운동으로 감지하고 기억하며, 그것을 연주하듯이 캔버스 위에 옮긴다. 그때 대상이 어떤 리듬과 어떤 빠르기를 가졌는지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 작가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화폭에 옮겨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듯 - 어쩌면 세계 자체가 작곡가이며 작가는 연주자인 듯 – 작가는 자신이 외운 악보를 떠올리며 최대한 원곡에 성실하게 그려낸다(또는 연주한다).

그러니 ‘(과거에) 바라본 풍경을 기억하여 그린다’라는 말은 잘못되었거나 또는 충분치 않다. 작가는 시감각만으로 통해 대상을 바라보고 회화로 옮겨내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모든 감각으로 대상과 접촉하고 그 접촉의 순간을 옮겨내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는 대상의 질감과 리듬뿐만 아니라 자신의 움직임과 호흡이 함께 표현된다. 즉 풍경이 재현된 것이 아니라, 접촉의 순간이 재현된다.

그것은 과거의 기록이 아닌 매 순간의 ‘현재’로 소환되어 우리 앞에 새롭게 등장한다. 회화 역시도 또한 물리적 몸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잔이 ‘세계를 그리면서 그것을 완전히 하나의 광경으로 옮겨, 이 세계가 어떻게 우리와 접촉하는지를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는 것처럼 물리적 몸을 가진 회화는 다시 하나의 세계로서 우리와 접촉한다. 
 
니체는 자신의 미학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개념을 도입하여 “아폴론 적인 것이 눈에 대한 자극과 눈의 반응에 따라 주어지는 이미지인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원래 몸 전체에 대한 자극과 몸의 총체적 반응을 유도하는 리듬”이라고 말했다. 이는 ‘회화’를 아폴론 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나, 그는 다시 회화의 색감이 보는 이의 몸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실체를 가진 무언가를 감지한다는 것은 결코 시각적이기만 한 반응일 수 없다.

그림 역시도 캔버스와 물감, 종이와 목탄 등의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회화를 통해 다만 시각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것은 마치 회화의 앞이나 뒤에, 안이나 바깥에, 즉 그림의 주변 어딘가로 휘말려 들어간 시간과 공간, 총체적인 세계의 파편을 마주한 것과 같은 느낌을 불러온다. 작가가 자신이 풍경과 접촉한 순간을 재현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 마주치게 하고자 한 것은 현장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 접촉의 순간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 그림들은 어쩌면 ‘재현’이 아닌 ‘번역’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실제의 광경을 이미지로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제의 무엇을 실제의 다른 무엇으로 옮겨 놓는 것이니 말이다. 그것은 동등한 경험을 제공하는, 변환된 광경이다. 작가는 자신이 마주한 풍경, 마주한 순간의 감각을 ‘벡사시옹’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고, 또 당신이 마주하고 있을 그림으로 번역하였다.

‘열림’과 ‘마주침’ 외에도 많은 층의 감각과 의미가 집적된 ‘벡사시옹’이라는 단어는 아마 꽤 고심하면서도 매우 직관적으로 선택된 단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몸의 기억을 수없이 더듬어가며 그러낸 수많은 습작을 버리고 마침내 그의 직관이 ‘옳다’고 말하는 바로 그 이미지를 토해내었을 것이다. 여타의 번역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그림들은 원작과 매우 유사한 리듬을 가지면서도 자신(번역가)의 정서와 인격을 함께 담는다. 그리고 그 자체로의 고유한 리듬을 갖고 다시 우리에게 풍경으로 감지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