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서 회화, 조각, 영상, 사진과 같은 전통적 분류법으로 미술형식을 설명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분류를 통해서 작품을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매체만 따로 떼어서 논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각과 담론이 서로 연결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란 매체, 제작방식, 판매, 전시 그리고 그것의 역사와 사유방식의 연계를 말하며, 회화, 조각, 영상, 사진 체계 속에서 작품을 분석하게 된다.

아마도 이런 연유에서 일까, 우리는 현대미술에서 자신이 조각가임을 혹은 화가임을 강조하는 작가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건축과 디자인을 넘나드는 호레 파르도는 자신의 작업이 조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호레 파르도가 L.A 현대미술관 개인전에 지은 집(Jorge Pardo: 4166 Sea View Lane, 1998)은 실제 집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아닌 조각이다. 이 집을 조각의 시스템에서 이해한다면 여기에는 조각이라는 매체의 특성, 제작과 전시 방식, 판매경로 그리고 미술의 역사와 그것의 특정한 사유방식이 연루되기 때문에 미술과 건축 혹은 디자인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티노 세갈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티노 세갈의 퍼포먼스는 현대무용의 안무와 공연의 조건을 전제로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티노 세갈은 그의 퍼포먼스를 조각의 연장선에 놓으며 미술의 제작과 생산방식, 전시조건을 호출하고 경제시스템을 연루시키며 예술생산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제안한다. 이렇듯 한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통적 매체구분이 전망하는 것은 단순히 시대착오적이지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강서경의 작업도 물론 회화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회화보다는 오브제, 조각, 영상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의 전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화보다는 오브제-설치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지금까지 강서경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요소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의 회화적 시스템은 강서경 작업의 주요한 분석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회화 시스템은 회화의 본질, 제작방식, 유통경로 그리고 회화의 역사적 맥락과 그것을 사유하는 방식이 서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서경이 회화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무엇이 강서경의 작업에서 회화를 호출하게 만드는가? 강서경의 작업에서 최소한의 단위로 환원된 페인팅(〈모라 Mora〉), 캔버스가 사라진 빈 프레임들(〈정井〉), 그리고 〈모라Mora〉와 〈정井〉의 다양한 연출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재현의 회화는 없다. 하지만 강서경이 회화를 어떻게 사유하는지 또 어떻게 회화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구현되었더라도 분명 회화의 본질과 조건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강서경은 더 이상 회화를 재현의 공간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이제 ‘인식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재현의 회화에서 인식의 회화로 전환된 강서경의 작업은 작가에게 새로운 미학적 실천을 요구한다. 이것은 작가가 형상을 완성하기 이전 단계부터 자신이 구상하는 형상들이 하나의 고정된 구조 속에서 진화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론과 형식은 형상들의 활동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즉, 강서경의 작업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계획을 세우며,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생산적 결합을 위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것이다. 강서경은 이를 위해 아주 오래된 우리의 악보인 ‘정간보(井間譜)’를 호출한다. 작가는 정간보의 한 칸을 이루는 작은 사각이 자신이 생각하는 캔버스의 최소 단위(Mora)와 프레임(정井)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박자, 가사, 동작이 들어 있는 정간보의 작은 사각은 ‘회화의 조건’과 오버랩 되며 그것을 작동시키는 악보가 되는 것이다.

강서경의 신작 〈검은아래 색달〉은 퍼포먼스를 기록한 러닝타임 26분짜리 비디오 영상이다. 이 작업은 회화를 대변하는 〈정井〉(프레임 구조물)의 연주를 보여준다. 칠흑같이 어두운 무대에 두 개의 ‘정井 구조물’이 등장하고, 이 〈정井〉을 조정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24시간을 네 개의 축으로 쪼개서 4개의 챕터를 만들었고, 각 챕터는 만남과 헤어짐의 미묘한 관계를 은유하는 움직임들로 전개된다. 물론 이 모든 움직임은 지극히 정교한 시나리오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어찌 보면 서사가 배제된 추상적 안무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 〈검은아래 색달〉은 두 남녀의 세속적 사랑 이야기를 담은 쌍화점(雙花店)을 근간으로 한다. 정간보(井間譜)의 작은 사각과 회화의 프레임이 오버랩 되듯이 두 개의 구조물과 오브제들 그리고 두 남녀는 비밀스런 사랑놀이를 은밀하게 전개한다.

강서경의 프로젝트에서 회화는 하나의 단위로 전환된다.(Mora, 정井) 이 단위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특정한 시나리오와 함께 세밀한 연주를 위한 장치가 되는 것이다. 강서경의 ‘정간보’는 회화를 연주하기 위한 특수한 악보인 것이다. 악보는 평면이고 시각적이다. 반면 연주는 입체적이고 공감각적이다. 회화는 〈검은아래 색달〉에서 입체화되고 공감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프로젝트로서의 회화는 우리에게 과거와는 조금 다른 각도의 질문들을 던져준다. 이전에는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가에 주목했지만, 이제는 무엇이 작품의 영역을 결정하며, 어떤 제스처에 의해서 작품의 영역이 시작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작품은 그 영역의 한계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그것의 탐구 흔적을 남기는가, 또 이 영역의 윤곽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게 된다. 오늘날 작품의 영역이 주제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개념을 대신하게 되면서, 무엇을 그렸는가 보다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서 어떠한 계획을 구상하고, 그것을 위하여 어떠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며, 또 작가의 논리와 형식은 여기서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정간보에 대한 참조는 〈검은아래 색달〉을 통해 구체적이고 완벽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강서경의 이전 작업들에서도 우리는 정간보의 작은 사각 속의 리듬, 소리, 움직임을 찾아 볼 수 있다. 레이어의 반복적 움직임은 불규칙적 리듬감을 형성하며 캔버스를 채워나가고(〈정井2014〉, ), 무게로 지탱하며 감각적으로 쌓아 올리는 행위는(〈정井-One time pause 2013-2015〉, ,〈쌍䉶-Shy gray 2013-2015〉) 불균형과 불안정 형태를 탄생시키며 공간을 점령한다. 강서경의 작업에 등장하는 모든 캔버스, 오브제, 프레임 구조물은 공간 속에서 유기적 결합과 자율적 해체를 반복하며 하나의 쌍䉶을 이르게 된다. 이렇게 강서경의 시각적 악보는 완성되고, 정 이라는 그리드 속에서 연주가 시작된다.

〈검은아래 색달〉은 쌍화점 이야기/회화의 조건을 연주하는 ‘악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 악보는 우리에게 소리를 통해서 형상을 인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강서경의 악보는 프레임(회화)의 움직임이 만들어 낸다. 이 움직임들은 또 두 남녀의 비밀스런 사랑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검은아래 색달〉은 퍼포먼스-영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사실 강서경이 만들어 낸 것은 ‘악보(평면-회화)’인 것이다. 강서경의 〈검은아래 색달〉악보는 언제나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오브제/구조물 들이 서로 부딪치고 스쳐가고 얼싸 안으며 외면하는 미묘한 움직임을 지시한다. 정간보에서 출발한 이 악보 개념은 비단 그의 최근 작업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그랜마더타워 Grandmother Tower 2011-2013〉의 철제 접시건조대와 나무에 실을 감아서 만든 구조물들은 서로서로를 지탱하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할머니와의 시간을 기억하는 기념비로서의 조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발견된 오브제와 수공예적 측면을 부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랜마더타워 Grandmother Tower〉의 핵심은 서로서로 지탱가능 한 무게중심에 있다. 무게들이 서로를 받쳐주면서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 간다. 결국 여기서도 무게를 잡아주는 악보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강서경의 초기 작업인 〈그랜마더타워 Grandmother Tower〉는 사실 악보 없는 즉흥연주에 가깝다. 작가가 매 순간 감각적으로 구조물의 무게를 느끼고 맞추면서 쌓아 올려 진 형태기 때문이다. 이러한 즉흥연주의 반복은 〈치효치효鴟鴞鴟鴞 2013〉와 〈매매종邁邁鍾 2013〉을 거치면서 서서히 악보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검은아래 색달〉을 통해서 정간보를 참조한 구체적 악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런던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작은 부엉이 오브제는 역사와 픽션의 세계를 넘나드는 서사적 악극을 위한 악보(치효치효鴟鴞鴟鴞)로 발전했으며, 역시 우연히 발견한 철제 종을 근간으로 시경 중 주공의 시 〈백화白華 〉에서 발췌한 시구와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접목하며 기다림, 그리움, 반가움, 두려움을 노래하는 악보(〈매매종邁邁鍾〉)이 탄생한 것이다. 작가의 할머니와의 기억을 기념하는 〈그랜마더타워 Grandmother Tower〉와 〈둥근 계단 Circled Stair 2011-2013〉 또한 할머니의 투병을 바라보는 애틋한 연민을 노래하는 악보인 것인 것이다.

〈치효치효鴟鴞鴟鴞〉, 〈매매종邁邁鍾〉, 〈그랜마더타워Grandmother Tower〉 그리고 〈검은아래 색달〉으로 이어지는 강서경의 ‘악보’는 평면, 사각, 프레임 그리고 리듬, 움직임, 서사로 구성된다. 이 악보는 회화의 조건을 뛰어넘지만 평면을 고수하고 추상과 구상이 공존을 연주한다. 회화의 조건을 연주하는 강서경의 악보는 정교하고 치밀한 음계들로 구성되지만 언제나 그것을 빗겨갈 수 있고 거기서 미끄러질 수 있는 소박한 자유를 갖고 있다. 그의 악보는 규칙과 균형을 찾아나가기 보다는 불안정과 불균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