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이를 알 수가 없기에(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우리로 하여금 설문지를 채우게 하는 고용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출생 연월일, 부모의 직업, 교육 정도, 경력, 주거 상황, (나의 조국에서는 공산당 가입 여부가 덧붙는다), 결혼, 이혼, 자녀들의 출생 연월일, 성공, 실패… 끔찍한 일이지만 바로 이렇게 우리는 행정적 설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웠다.

– 밀란 쿤데라, 『불멸』[1]

Hayoun Kwon, Lack of Evidence, 2011, Animation, single-channel video, color, stereo sound, 9 min. 20 sec. Production : Le Fresnoy – Studio national des arts contemporains. ©Hayoun Kwon

I. 들어가며

권하윤은 주로 경계와 정체성을 주제로 개인의 역사와 기억을 재구성하며, 현실과 가상 사이의 양가적인 관계를 탐구해 왔다.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는 매체로 작가는 ‘이야기’라는 원초적 소통 수단에 주목하는 동시에, 3D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VR(가상 현실) 등을 사용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어떻게 대화하고 관계 맺고 있는지 보여 준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의 혼성 장르를 통해 DMZ와 같은 군사적 접경 공간이나 국경선 등의 지리적, 정치적 경계가 지닌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본성을 드러내는데, 이때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을 통한 ‘에피소드’가 진실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작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처음, 중간, 끝으로 구성된 ‘전체’의 규칙을 따른 플롯과는 반대로 개연적이고 필연적이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들의 연속인 에피소드식 구성을 가장 나쁜 것”이라 평가한 바 있다.[2] 그에게 에피소드는, 이야기의 인과적 연쇄 고리 바깥에 놓여 전체 구성에서 빠진다 해도 전혀 무관한 ‘실없는 우연’일 뿐, 등장인물들의 삶에 흔적을 남기지도 못하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의 연속이다.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에 출품하는 권하윤의 4개 작업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2014), 〈489년〉(2016), 〈옥산의 수호자들〉(2024)은 제국주의, 정체성, 이데올로기, 국가, 민족, 인간 너머의 존재, 원주민과 식민지 역사 등을 가르는 무수히 많은 경계 위에서 개인들의 기억이나 경험에 잠재된 인과적 결과들이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 갖가지 결과들을 유발할 수 있는 에피소드의 상대성에 주목한다. 에피소드는 ‘지뢰’와 같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구성해 낼 수 있는 잠재태로, 대부분은 영원히 폭발하지 않으나 가장 하찮은 지뢰 하나가 부메랑이 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날이 올 수 있다.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모든 사건은 나중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그리하여 어떤 이야기로, 어떤 역사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권하윤은 프랑스 낭트 생나제르 에꼴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던 당시 일본인 룸메이트와의 대화 중 미묘한 역사적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일제 강점기 식민지 역사를 강조해 온 한국의 교육 과정을 경험한 자신과 달리, 일본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본인 친구의 역사 인식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곧장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 해석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하며 일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일제 식민주의 역사에 대해 깨달은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를 받은 작가는,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을 갖지 않은 이들(후손들)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으로 그는 2010년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획했다. 그 공간이 기억하는 진실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담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곳은 말초적인 자극을 유도하는 역사 체험들과 관광지의 스펙터클로 채워져 있었고, 역사의 이면에 감춰진 사실이나 정당성, 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누군가의 고통마저 몰래카메라로 훔쳐보는 은밀한 구경거리로 대상화되고,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한 이미지로 추상화시키는 현장이었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독립운동가의 사진이나 당시 현장을 재현한 설치물들은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동정심이나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지만, 그 순간 그 고통이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 이외에도, 고통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무책임함,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무능력함에 대한 감정도 유발한다.

결국 그의 다큐멘터리 영상 〈벽〉(2010)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졌다. 의도적으로 지워지거나 삭제된, 또는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이나 기억은 어떻게 증언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증인 이론에서 부정되거나 제한되었던 사물이나 공간들에 주체성을 부여한다면 은폐된 역사의 잔해 더미 속에서 감추어진 역사적 인간들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증인을 증인으로 인정받게 하는 것일까? 법정에서, 실험실에서, 미디어에서 인정되는 증언의 조건은 무엇인가?


II. 관계적 과정으로서의 ‘증언’

그 시기 권하윤은 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스스로 체류 허가증을 받기 위해 출입국 사무소를 드나들며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국가’라는 경계 개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이들에게 ‘국경선’은 우리와 타자,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작가는 국경선을 “인간이 만들어 낸 완벽한 픽션의 산물”이자,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으로 여긴다. 2011년 작품 〈증거부족〉은 경계에 대한 이러한 작가의 개념이 반영된 초기 작업으로, 프랑스로 망명을 신청했으나 ‘객관적’ 증거 부족으로 거부당한 나이지리아 태생의 오스카(가명)라 불리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제작한 영상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서구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상황적 지식’이 만들어 낸 허구적인 거대 서사 속에서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는 한 아프리카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에피소드적 기억을 ‘구원’할 수 있는 서사 구조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다.

동화나 설화 속 한 장면처럼 보이는 3D 애니메이션 영상은 짙은 어둠이 깔린 고요한 나이지리아의 한 시골 마을 전경을 비추며, 불어를 사용하는 한 중년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 여성은 오스카의 프랑스 망명 신청을 도왔던 통역사로, 오스카 형제가 마을을 탈출하기 위해 도망쳤던 날 벌어진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가상 카메라가 오스카의 집 안으로 들어와 내부 구석구석을 훑으며 움직일 때, 영상은 그 이미지들이 만들어진 3D 그래픽의 골조를 드러내고, 화자는 여성의 시점에서 오스카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오스카 형제는 새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이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낯선 이들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뒷마당에서 이어지는 마을의 숲으로 달아났다. 이들이 집 밖으로 도망치는 장면부터 영상은 사실주의적 3D 애니메이션 그래픽이 아닌 흑백의 라인 드로잉 스케치로 변화하며,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픽션인지 알 수 없는 구술 기억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뒤에서 도망치던 쌍둥이 형제가 아버지의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난 뒤 혼자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오스카는 다시 자신의 조국 나이지리아로 돌아갈 수 없어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마을의 의례를 관장하는 사제이자 주술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쌍둥이를 부정한 존재로 인식했던 나이지리아 부족 공동체의 오랜 문화적, 종교적 신념과 전통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오스카 형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망명을 위해 프랑스 정부에 제출한 증거 자료는 오스카의 구술 기억을 불어로 번역한 진술서와 탈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연필로 그린 마을 지도 그림 한 장이 전부였다. 영상은 이 물리적 증거인 A4 용지들을 비출 때만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촬영한 화면으로 편집된다.

〈증거부족〉은 역사적으로 또는 행정적으로 국가 권력이 어떠한 사건을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그것을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행정적 설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은 권력의 완벽한 도구가 되어 서구 근대 제도를 구성해 왔다. 그에 반해, 내밀하고 사적인, 주관적 기억은 승자들의 세계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부족 공동체의 신념과 종교적, 정치적 영향으로 목숨의 위험에 처한 어느 나이지리아인의 구술 기억은 유럽 국가에서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증언이며, 타자로서 이들의 고통과 공포는 끊임없이 근대사에서 은폐되어 왔다. 작가는 스스로 인위적인 이미지임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과 주어진 환경을 캡처하는 실사 촬영 기법을 혼합하고, 불어 통역사의 목소리로 한 아프리카인의 에피소드적 사건과 애매모호한 사실 관계를 오가는 서사 구조를 만들어 관습적 다큐멘터리의 인식론적 전제를 넘어선다. 이러한 새로운 다큐멘터리 방법론을 통해 작가는 “사건들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경합하는 진실들을 구축하는 이데올로기와 의식, 즉 우리가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의존하는 허구적인 거대 서사를 드러낼 뿐이다.”[3]

그렇다면, 그 ‘허구적인 거대 서사’는 지금까지 어떻게 구축되었고 뒷받침되어 온 것인가? 진보의 시간 속에서 의미가 승인되는 근대적 역사 기술은 인과적 서사 구조에 따라 기획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계몽주의로부터 계승된 근대적 제도의 토대로서 과학적, 법적 증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가장된 중립성’이었다. 제도적으로 승인되는 증언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 감정 등이 반영되지 않은 철저한 객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를 거울처럼 보여 줄 수 있도록 사실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목격자는 “눈에 보여서는 안 되며, 자기 비가시성(self-invisibility)이라는 기이한 관습에 의해 구축된 강력한 ‘표시가 없는 범주(unmarked category)’의 거주자”[4]이어야 했다.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한 듯 인종, 계급, 젠더적 표지를 감추는 이 ‘겸손한 목격자’의 가장된 비가시성이 역설적으로 ‘근대, 유럽, 남성적’ 과학 지식의 객관성과 단일한 주체 개념을 보증하게 되었고, 과학은 세계를 파악하는 권위적인 방식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세계는 오로지 서구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상황적 지식’을 초월적, 총체적, 객관적 지식으로 간주하게 되었다.[5]

프랑스 정부 관료들에게 흑인 오스카가 증언하는 나이지리아 일부 부족의 전통적 신념, 관습, 종교 의식과 같은 ‘상황적 지식’은 넘쳐나는 가시적 표지들로 인해 객관적 사실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증언은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관점에서 누군가에 의해 ‘통역’되어야 하는 비인간화된 사건으로 여겨질 뿐이다. 국경을 넘어 망명을 신청한 이의 정당성을 심판하는 곳에서, 그것은 ‘증언’이나 ‘목격’의 지위를 얻어 정의의 사건으로 진위를 가리고 무엇이 중요한지 밝히며 사건을 정의의 무대로 끌어올릴 이유가 없다고 보이는 이야기꾼의 모험담이다. 권하윤은 〈증거부족〉에서 3D 애니메이션의 활용으로 증언을 증언자의 모습이나 증언의 행위 또는 대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인간 집단과 그들의 관습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관계적 과정을 구축했다.


III.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모순적인 공간, 에피소드를 매개로 한 공동의 공간

사회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 경계로서 ‘국경선’에 대한 권하윤의 관심은 줄곧 한국의 남북한 군사적 접경지대인 DMZ를 향해 있었다. DMZ는 군사 순찰 외에는 외부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장소로, 사실상 인간의 진입이 금지된 곳이다. 북한이 체제 선전을 위해 DMZ 내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민간인 거주 마을 기정동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기 위해 몇 해 동안 시도했던 촬영 허가 요청이 무산되자, 작가는 그 선전 마을을 직접 건축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모형을 촬영해 디지털 영상을 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델 빌리지〉(2014)는,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을 흰색으로 칠한 지형에 조립한 모형 안에서 가상 카메라가 움직이고, 다양한 사운드, 강한 조명으로 조절되는 빛과 그림자의 연출을 통해 그곳의 연극성을 드라마틱하게 시각화한다.

아무도 방문할 수 없고, 아무도 살 수 없는 이 마을 모형을 비추는 가상 카메라가 실제 외국인 투어 가이드의 목소리를 따라 마을 내부로 들어가면, 북한의 생활상을 재연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는 방송이 송출된다. 화면은 이 모든 재연의 인공성을 노출시키는 장치들을 드러내며 그 장소의 허구성을 극대화한다. 마을 전체에 인공적 조명이 드리우고 그래픽으로 축조된 산 위에 마을의 그림자를 투영할 때, DMZ라는 지정학적 장소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시각적 증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심리적 경계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모델 빌리지〉(2014)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텅 빈 대상과의 물리적 관계를 다루었다면, DMZ의 풍경을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환상적으로 그려 낸 〈489년〉(2015)은 그곳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했던 구술자의 실제 경험을 작가가 상상적으로 구현해 낸 작업이다. 〈489년〉은 DMZ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했던 한 군인이 당시의 기억을 증언하는 실제 육성을 듣고 작가가 자신의 상상을 통해 재현한 DMZ의 풍경 안으로 관객을 진입시킨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현실 속 가상 공간인 DMZ를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현실에서 픽션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VR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한다. VR이라는 매체는 이미지들 사이로 신체적 경험을 가능케 하여 인간 존재의 일시성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모순적인 공간 안에 들어선 관객은 자기만의 성찰을 통해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이렇게 작가는 누군가의 개인적 기억, 에피소드를 매개로 화자와 청자 간의 공동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에피소드는 누군가의 이야기, 몸짓, 어떤 냄새나 맛으로부터 불현듯 활성화된 뇌의 작용이 기억의 흐름을 촉발하여 상상과 모순의 서사를 창조하게 한다. 〈489년〉에서 김씨 아저씨가 구술하고 있는 DMZ의 기억들은 “노루가 밟아서 터트리는 지뢰 소리가 들리면 동료 취사병이 냄비를 들고 부상당한 동물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 “새벽에 초소에서 DMZ를 바라보며 소변을 눌 때 얼마나 풍경이 아름다운지”, “적들이 지나갔는지 알기 위해 돌멩이를 철조망에 끼워 놓고 다음번 수색할 때 다시 확인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에피소드들이다. 한 개인의 에피소드는 이야기하는 사람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여, 함께 그 사건들의 목격자로서 공동의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계속 재구성되는 에피소드의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속성은 인쇄 매체의 발달 이후 사라진 구술 문화의 공동체적 경험의 교환 능력을 회복시킨다.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6]에 원천을 두고 있다. 이야기꾼은 ‘먼 과거’, ‘먼 장소’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 놓고, 다시 청자들의 경험을 만들어 낸다. 구술 문화의 전통에서 신화나 설화, 영웅의 이야기들이 암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재창작이나 개작이 이루어져 동일한 설화나 이야기의 수많은 변본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인쇄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소설이나 정보와 같은 근대적 소통 형식에서 사라졌다. 이는 근대라는 시기에 그만큼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감소”[7]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권하윤은 3D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 환경에서 이야기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캡처하는 실사 영화와 달리, 3D 애니메이션은 작가 또는 관객 그 누구든 타자의 서사 위에 자신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되쓰기’할 수 있는 틈이 창출된다. 제목 ‘489년’은 그곳에 100만 개 이상의 지뢰를 제거하는 데 걸릴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을 나타낸다. 영상의 마지막에 DMZ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남자의 희망이 선언될 때 전선은 불바다로 변한다. 현실상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경계선이 천천히 노스탤직(nostalgic)하게 사라지는 극적인 장면은 DMZ가 ‘꽃(아름다움)’과 ‘지뢰(위험)’가 공존하는 상상적이고 모순적인 공간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처럼 권하윤의 3차원적 가상 공간은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를 동일한 지평에 위치시키고 상호 교환의 회로를 구축”함으로써 “경계에서의 기억을 말하는 증언자의 목소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질문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 된다.[8]

Hayoun Kwon, The Guardians of Jade Mountain, 2024, Interactive VR installation, color, sound, 3D animation, Dimensions variable ©Hayoun Kwon

IV. 마법 같은 우정을 증언하는 ‘그림자극’

권하윤은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를 주제로 미완성한 다큐멘터리 작업 〈벽〉에 대한 아쉬움을 남겨둔 채, 2021년 우리와 같은 일제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만에서 동아시아 근대사 리서치를 재개했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만에서의 리서치는 반복되는 격리와 중단으로 인해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의 작업 대부분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는 주관적인 시점만이 존재”하며,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해도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책의 한 줄이 아니라 옆에서 들려준 한 마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9]

고립된 상황이 지속되며 우여곡절 끝에 작가는 20세기 초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시기를 기록한 산발적인 사료들 속에서, 대만의 소수 민족 원주민 문화를 연구한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森丑之助, 1877–1926)와 대만 고산 지대 원주민 부눈(Bunun)족의 족장 아지만 씨킹 사이에 성립된 특별한 우정이 기록된 한 에피소드에 주목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남겨진 기록이 아닌 구전되어 전해지는 설화이지만, 권하윤은 당시 대만에서 활동한 일본인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가 남긴 사진과 지도, 메모 등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와 3D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열린 서사 구조를 만들고, VR 인터페이스로 관객이 1900년 초 대만의 고산 지역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과 역사 속 개인의 에피소드에 몰입해 들어갈 수 있도록 〈옥산의 수호자들〉(2024)을 구성했다.

영상은 1895년 18세의 나이에 육군 통역관으로 대만에 와서 원주민에 관한 현장 연구를 수행했던 모리 우시노스케가 대만에서의 활동을 접고 18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며 동료들에게 남겼던 작별 연설을 따라간다. 모험적인 현장 측량사였던 모리 우시노스케는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진심 어린 교류를 하며 여러 부족의 언어를 익혀 원주민 언어에 관한 다섯 권의 책을 출판했을 정도로 “대만 원주민의 선도적 연구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인류학, 역사, 민속학, 고고학, 식물학, 지리학 분야의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해 박물관의 소장품을 구성하고 『대만 원주민 연대기』 1–2권을 완성한 그는, 일제의 원주민 탄압 정책에 맞서며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이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는 철저한 현지 조사를 기반으로 일본 점령 초기 대만의 자연주의자로 불리며,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야생 지역으로 원시림과 다양한 동식물이 보존된 대만의 옥산(玉山, 위산)을 최초로 등정해 식물 표본을 수집해 연구했다. 그 결과 20개 이상의 대만 고산 식물이 식물학계에 ‘Mori Ushinosuke’의 이름을 딴 표본으로 등록되어 있다.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 현실 안으로 들어선 관객은 가상 카메라(virtual camera)의 움직임을 따라 3D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대만 섬 지도의 원주민 마을 전역을 상공에서 바라보게 된다. 섬 한가운데 타워처럼 거대하게 솟아오른 삼각대에는 20세기 초 인류학자들의 도구였던 대형 카메라가 놓여 각각의 촌락을 이동하면서, 모리 우시노스케의 시선으로 원주민들의 구체적 생활상을 흑백 사진에 포착한다. 관객이 실제 공간을 거닐다 대만 원주민들의 기록을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가상 현실 속 내러티브는, 모리의 카메라가 고산 지대 원주민 부눈족의 마을로 향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5개년 통치 정책에 맞서 저항했던 원주민 항일 운동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어 무대는 반딧불이들이 발산하는 환상적인 불빛을 따라 옥산의 아름다운 야생 풍경 안으로 이동하고, 대나무등을 손에 든 관객들은 숲속 천산갑(pangolin), 다람쥐, 부엉이, 나비들이 안내하는 산길을 따라 걸으며 모리의 서사 속으로 이끌린다. 모리는 일주일간 대규모 지리 조사 팀을 구성해 옥산 탐사를 하던 중, 일본인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가족과 친척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던 부눈족 족장 아지만 씨킹에게 닷새 동안 쫓기며 목숨을 위협받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옥산의 수호자들〉은 가상 현실 체험 인터페이스로 관객이 대나무등을 들고 이동하다 산속 바위 절벽 위에 팔을 뻗어 불빛을 비추면, 모리 우시노스케가 이야기하는 경험담과 역사적 사실, 아지만 씨킹과의 에피소드들이 그림자극으로 펼쳐진다. 관절이 움직이는 종이 컷아웃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그림자는, 일본 군대가 욱일기를 앞세우고 원주민 지역으로 총성을 울리며 밀고 들어오는 장면, 이에 원주민들이 활을 들고 저항하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끊임없이 모리를 향해 활을 쏘는 아지만과 날아오는 활을 피해 수풀 뒤로 몸을 숨기며 옥산의 식물들을 조사하는 탐험가 모리의 움직임을 긴장감 있게 보여 준다. 실제인지 꾸며진 이야기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방문하는 그의 작업은 동남아시아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고대의 스토리텔링 형식인 그림자극을 매개로 원주민 문화와 자연이 지닌 영적인 세계에 접속한다.

권하윤이 가상 현실에 적용한 그림자극은 주로, 이야기꾼들이 대부분 반은 사실이고 반은 허구에 기반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할 때나, 서사시나 힌두교 신화 또는 전설을 이야기하는 마을의 성스러운 공연에 활용되던 수단이었다. 〈옥산의 수호자들〉에서 그림자극은 마치 이들의 일화를 지켜봤던 옥산의 바위가 관객이 손에 든 등의 빛을 비추는 순간 마법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증언하는 무대가 된다. 등을 들고 가상 현실 속 옥산으로 들어선 관객을 낯선 오솔길로 안내하던 천산갑, 다람쥐, 부엉이, 나비, 반딧불이, 그리고 모리 이름을 학명으로 갖는 각종 식물도 인간 세계에서 글로 남겨지지 않은 것들을 알려 주기 위해 공모하듯 서사를 이끌어간다. 모리는 작별사에서,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무장하지 않고 모든 열정을 바쳐 밤낮으로 걸어 탐험을 마친 자신의 용기로 아지만에게 인정을 받아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림자극은 총과 칼, 활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무기를 내려놓은 손을 이어 잡고 둥근 대형으로 서로를 감싸는 모습을 비추며 이들의 마법 같은 우정을 증거한다.

권하윤은 이 작업에서 동아시아의 일본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역사를 매개로 ‘적’의 개념을 탐구한다. 그가 이전에 DMZ와 같은 국경선을 비롯한 경계의 개념을 허구적이고 상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진실을 재구성하는 에피소드의 상대성에 주목해 온 것처럼, 역사적 내러티브 안에서 ‘적’의 개념은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협력적 의사소통인 친화력을 통해 번성했다. 그 친화력의 다른 면으로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타인 혹은 타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러한 속성 때문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행하는 극단적인 비인간화는 또 다른 극단적 대응을 야기한다. 극단이 극단을 부르는 이 역학 관계는 특정 정치 운동이나 특정 문화권, 혹은 특정 시대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중국의 문화 혁명,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테러, 프랑스 혁명, 일본 제국주의까지 권력자는 어떤 형태의 정부로도 비인간화와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인간이 집단적 행동으로 타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본성이 치유될 방법이 증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구출했다. 발각되면 고문을 받거나 국외로 추방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으며 온 가족이 몰살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꺼이 위험에 처한 유대인을 헛간이나 다락방 등에 숨겨 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치 편을 들거나 혹은 방관할 때 이들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돕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사회학자 올리너 부부(Samuel P. Oliner, Pearl M. Oliner)는 이 시기 유대인을 구출한 유럽인들의 증언을 분석한 결과, 찾아낸 공통된 특징은 단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가 전쟁 전에 유대인 이웃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다. 성별, 교육 수준, 정치적 성형, 부의 정도나 직업에 있어서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때 혹은 여전히 깊은 마음을 나눈 유대인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0] 유학 시절부터 권하윤이 탐구한 ‘적’의 개념 또한 국가나 이데올로기, 전통이나 종교적 신념보다 사적인 관계에서 맺었던 우정과 접촉의 경험으로 그 경계가 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한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V. 나가며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만들어 낸 서로 다른 코드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지각을 변화시키며 진보해 왔다. 최초의 매체 기술인 ‘문자-인쇄술’은 근대적 자아의 핵심적 미디어로, “억압을 통한 질서화”라는 근대성의 표본을 이루었다. 인류세라 불리는 이 시대 우리는 행성적 규모로 역사의 ‘되쓰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룬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2014), 〈489년〉(2016), 〈옥산의 수호자들〉(2024)로 이어진 권하윤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에 나타난 서사 구조의 에피소드적 특성은, 모더니티와 대립되는 개념의 동시대성 안에서 역사가 어떻게 새로운 양식화를 이루는지,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 종교들, 언어들 사이의 조우가 심해진 오늘날 어떻게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이 ‘되쓰기’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되쓰기’의 방법은 결코 그 어떤 “헤게모니를 창조하지 않으며, 지역과 지방을 재평가하고, 은폐된 지도와 망각된 역사를 재등장시킨다.”[11]

권하윤은 역사 구성의 잠재태로서 ‘에피소드’적 서사를 매개로 화자와 청자 간의 공동의 공간을 만들고, VR 기술을 통해 이미지들 사이로 관객이 타인의 신체를 온전히 겪고 이에 감응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증거부족〉, 〈옥산의 수호자들〉 등의 작업에서 드러난 에피소드의 상대성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사건들을 선별하는 기준이 타인들의 시각, 즉 “행정적 질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굉장히 내밀하고 사적인, 자신만의 주관적 시각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그것은 오늘날 새로운 역사 기술의 방법론으로 제기될 수 있으며, 선형적 시간관에 따라 언제나 승자의 이야기, 권력자의 이미지만 남게 된 근대적 역사 쓰기로부터 탈피해 누구나 삶의 주체로서 그동안의 역사를 ‘되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궁극적으로, 권하윤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경험을 전달하는 과정 속에 발생하는 불투명하고 흐릿한 기억을 매개한다. 기억은 한 사람에게 고유한,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권하윤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동화 속 ‘파랑새’ 같은 것이다. 누구나 파랑새를 잡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잡지 못한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내 손등 위로 살짝 앉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 기억이다. 누군가의 체험된 삶, 지나간 사건들은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조련사의 ‘손짓’에 의해 날아드는 새처럼, 타인이 내뱉은 날숨을 기꺼이 들이마시려는 몸짓에 의해 지나간 삶의 순간들은 치장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우리 앞에 존재할 수 있다. 권하윤이 제시하는 상상과 모순의 내러티브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몸짓이 불러들이는 불투명한 삶의 기억들을 끊임없이 탈바꿈시켜 지속적으로 역사가 ‘되쓰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꾼다.


1. 밀란 쿤데라, 『불멸』, 김병욱 옮김(서울: 민음사, 2010), 487. 필자는 2019년 권하윤을 포함한 6인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불멸사랑》(2019.2.22–5.12, 일민미술관)을 기획한 바 있다. 이 글은 당시 전시 기획 과정에서 동시대 미술이 역사를 다룰 때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며 작가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MMCA 《올해의 작가상 2024》에 출품되는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2024) 및 3점의 대표작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 (2014), 〈489년〉(2016)을 분석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상섭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05), 39.
3. 김지훈, 「산책의 경험과 디지털: 개념주의, 리믹스, 3D 애니메이션」, 『평평한 세계들을 껴안기: 수천개의 작은 미래들로 본 예술의 조건』,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현실문화A, 2018), 101–102.
4. 도나 J. 해러웨이,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민경숙 옮김(서울: 갈무리, 2007), 76.
5. 해러웨이가 ‘겸손한 목격자’를 어떻게 재형상화하는지에 대해서는, 김애령, 「사이보그와 그 자매들: 해러웨이의 포스트휴먼 수사 전략」, 『한국여성철학』 제21권(2014): 74–76 참조.
6. 김남시, 「트위터와 새로운 문자소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개념을 중심으로」, 『기호학 연구』 제30권(2011): 12.
7. 김남시, 13.
8. 김지훈, 105.
9. 권하윤, 《불멸사랑》전 작가 인터뷰(2019. 4.).
10.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민아 옮김 (파주: 디플롯: 2021), 258.
11. 김기수, 「‘1989년 이후 컨템포러리 아트’에서 ‘동시대성’의 문제」, 『현대미술학 논문집』, 21집(2017): 73–78.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