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마법 같은 우정을 증언하는 ‘그림자극’
권하윤은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를 주제로 미완성한 다큐멘터리 작업 〈벽〉에 대한 아쉬움을 남겨둔 채, 2021년 우리와 같은 일제 식민지를 경험했던 대만에서 동아시아 근대사 리서치를 재개했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만에서의 리서치는 반복되는 격리와 중단으로 인해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의 작업 대부분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는 주관적인 시점만이 존재”하며,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해도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책의 한 줄이 아니라 옆에서 들려준 한 마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9]
고립된 상황이 지속되며 우여곡절 끝에 작가는 20세기 초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시기를 기록한 산발적인 사료들 속에서, 대만의 소수 민족 원주민 문화를 연구한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森丑之助, 1877–1926)와 대만 고산 지대 원주민 부눈(Bunun)족의 족장 아지만
씨킹 사이에 성립된 특별한 우정이 기록된 한 에피소드에 주목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남겨진 기록이 아닌 구전되어 전해지는 설화이지만, 권하윤은 당시 대만에서 활동한 일본인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가 남긴 사진과 지도, 메모 등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와 3D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열린 서사 구조를 만들고, VR 인터페이스로
관객이 1900년 초 대만의 고산 지역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과 역사 속 개인의 에피소드에 몰입해 들어갈
수 있도록 〈옥산의 수호자들〉(2024)을 구성했다.
영상은 1895년 18세의 나이에
육군 통역관으로 대만에 와서 원주민에 관한 현장 연구를 수행했던 모리 우시노스케가 대만에서의 활동을 접고 18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며 동료들에게 남겼던 작별 연설을 따라간다. 모험적인 현장 측량사였던 모리 우시노스케는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진심 어린 교류를 하며 여러 부족의 언어를 익혀 원주민 언어에 관한 다섯 권의 책을 출판했을 정도로
“대만 원주민의 선도적 연구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인류학,
역사, 민속학, 고고학, 식물학, 지리학 분야의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해 박물관의 소장품을
구성하고 『대만 원주민 연대기』 1–2권을 완성한 그는, 일제의 원주민 탄압 정책에 맞서며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이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는 철저한 현지 조사를 기반으로 일본 점령 초기 대만의 자연주의자로 불리며,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야생 지역으로 원시림과 다양한
동식물이 보존된 대만의 옥산(玉山, 위산)을 최초로 등정해 식물 표본을 수집해 연구했다. 그 결과 20개 이상의 대만 고산 식물이 식물학계에 ‘Mori Ushinosuke’의
이름을 딴 표본으로 등록되어 있다.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 현실 안으로 들어선 관객은 가상 카메라(virtual camera)의 움직임을 따라 3D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대만 섬 지도의 원주민 마을 전역을 상공에서 바라보게 된다. 섬 한가운데 타워처럼 거대하게 솟아오른 삼각대에는 20세기 초 인류학자들의
도구였던 대형 카메라가 놓여 각각의 촌락을 이동하면서, 모리 우시노스케의 시선으로 원주민들의 구체적
생활상을 흑백 사진에 포착한다. 관객이 실제 공간을 거닐다 대만 원주민들의 기록을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가상 현실 속 내러티브는, 모리의 카메라가 고산 지대 원주민 부눈족의 마을로
향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5개년 통치 정책에 맞서 저항했던 원주민 항일 운동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어 무대는 반딧불이들이 발산하는 환상적인 불빛을 따라 옥산의 아름다운 야생 풍경 안으로 이동하고, 대나무등을 손에 든 관객들은 숲속 천산갑(pangolin), 다람쥐, 부엉이, 나비들이 안내하는 산길을 따라 걸으며 모리의 서사 속으로
이끌린다. 모리는 일주일간 대규모 지리 조사 팀을 구성해 옥산 탐사를 하던 중, 일본인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가족과 친척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던 부눈족
족장 아지만 씨킹에게 닷새 동안 쫓기며 목숨을 위협받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옥산의 수호자들〉은 가상 현실 체험 인터페이스로 관객이 대나무등을 들고 이동하다 산속 바위 절벽 위에 팔을 뻗어 불빛을
비추면, 모리 우시노스케가 이야기하는 경험담과 역사적 사실, 아지만
씨킹과의 에피소드들이 그림자극으로 펼쳐진다. 관절이 움직이는 종이 컷아웃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그림자는, 일본 군대가 욱일기를 앞세우고 원주민 지역으로 총성을 울리며 밀고 들어오는 장면, 이에 원주민들이 활을 들고 저항하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끊임없이
모리를 향해 활을 쏘는 아지만과 날아오는 활을 피해 수풀 뒤로 몸을 숨기며 옥산의 식물들을 조사하는 탐험가 모리의 움직임을 긴장감 있게 보여 준다. 실제인지 꾸며진 이야기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방문하는 그의 작업은 동남아시아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고대의 스토리텔링 형식인 그림자극을 매개로 원주민 문화와 자연이 지닌 영적인 세계에 접속한다.
권하윤이 가상 현실에 적용한 그림자극은 주로, 이야기꾼들이 대부분 반은 사실이고
반은 허구에 기반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할 때나, 서사시나 힌두교 신화 또는 전설을 이야기하는
마을의 성스러운 공연에 활용되던 수단이었다. 〈옥산의 수호자들〉에서 그림자극은 마치 이들의 일화를 지켜봤던
옥산의 바위가 관객이 손에 든 등의 빛을 비추는 순간 마법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증언하는 무대가 된다.
등을 들고 가상 현실 속 옥산으로 들어선 관객을 낯선 오솔길로 안내하던 천산갑, 다람쥐, 부엉이, 나비, 반딧불이, 그리고 모리 이름을 학명으로 갖는 각종 식물도 인간 세계에서 글로 남겨지지 않은 것들을 알려 주기 위해 공모하듯
서사를 이끌어간다. 모리는 작별사에서,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무장하지 않고 모든 열정을 바쳐 밤낮으로 걸어 탐험을 마친 자신의 용기로 아지만에게 인정을 받아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림자극은 총과 칼, 활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무기를 내려놓은 손을
이어 잡고 둥근 대형으로 서로를 감싸는 모습을 비추며 이들의 마법 같은 우정을 증거한다.
권하윤은 이 작업에서 동아시아의 일본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역사를 매개로 ‘적’의 개념을 탐구한다. 그가 이전에 DMZ와 같은 국경선을 비롯한 경계의 개념을 허구적이고
상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진실을 재구성하는 에피소드의 상대성에 주목해 온 것처럼, 역사적 내러티브 안에서
‘적’의 개념은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종과 달리
협력적 의사소통인 친화력을 통해 번성했다. 그 친화력의 다른 면으로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타인 혹은 타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러한 속성 때문이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행하는 극단적인 비인간화는 또 다른 극단적 대응을 야기한다. 극단이 극단을 부르는 이 역학 관계는 특정 정치 운동이나 특정 문화권, 혹은
특정 시대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중국의 문화 혁명,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테러, 프랑스 혁명, 일본 제국주의까지 권력자는 어떤 형태의 정부로도 비인간화와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인간이 집단적 행동으로 타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본성이 치유될 방법이 증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구출했다. 발각되면
고문을 받거나 국외로 추방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었으며 온 가족이 몰살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은 기꺼이
위험에 처한 유대인을 헛간이나 다락방 등에 숨겨 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치 편을 들거나 혹은
방관할 때 이들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돕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사회학자 올리너 부부(Samuel P. Oliner, Pearl M. Oliner)는 이 시기 유대인을 구출한 유럽인들의 증언을 분석한
결과, 찾아낸 공통된 특징은 단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가
전쟁 전에 유대인 이웃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다. 성별, 교육 수준, 정치적
성형, 부의 정도나 직업에 있어서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때 혹은 여전히 깊은 마음을 나눈 유대인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0] 유학
시절부터 권하윤이 탐구한 ‘적’의 개념 또한 국가나 이데올로기, 전통이나 종교적 신념보다 사적인 관계에서
맺었던 우정과 접촉의 경험으로 그 경계가 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한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V. 나가며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만들어 낸 서로 다른
코드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지각을 변화시키며 진보해 왔다. 최초의 매체 기술인 ‘문자-인쇄술’은 근대적 자아의 핵심적 미디어로, “억압을 통한 질서화”라는
근대성의 표본을 이루었다. 인류세라 불리는 이 시대 우리는 행성적 규모로 역사의 ‘되쓰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룬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2014), 〈489년〉(2016),
〈옥산의 수호자들〉(2024)로 이어진 권하윤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에 나타난 서사 구조의 에피소드적 특성은, 모더니티와 대립되는 개념의 동시대성 안에서 역사가 어떻게
새로운 양식화를 이루는지,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 종교들, 언어들 사이의 조우가 심해진 오늘날 어떻게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이 ‘되쓰기’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되쓰기’의 방법은
결코 그 어떤 “헤게모니를 창조하지 않으며, 지역과 지방을 재평가하고,
은폐된 지도와 망각된 역사를 재등장시킨다.”[11]
권하윤은 역사 구성의 잠재태로서 ‘에피소드’적 서사를 매개로 화자와 청자 간의 공동의 공간을 만들고, VR 기술을 통해 이미지들 사이로 관객이 타인의 신체를 온전히 겪고 이에 감응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증거부족〉, 〈옥산의 수호자들〉 등의 작업에서 드러난 에피소드의
상대성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사건들을 선별하는 기준이 타인들의 시각, 즉 “행정적 질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굉장히 내밀하고 사적인, 자신만의
주관적 시각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그것은 오늘날 새로운 역사 기술의 방법론으로 제기될 수 있으며, 선형적 시간관에 따라 언제나 승자의 이야기, 권력자의 이미지만 남게
된 근대적 역사 쓰기로부터 탈피해 누구나 삶의 주체로서 그동안의 역사를 ‘되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궁극적으로, 권하윤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경험을 전달하는 과정 속에 발생하는 불투명하고 흐릿한 기억을 매개한다. 기억은
한 사람에게 고유한,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권하윤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동화 속 ‘파랑새’ 같은 것이다. 누구나 파랑새를 잡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잡지 못한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내 손등 위로 살짝 앉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 기억이다. 누군가의 체험된 삶, 지나간 사건들은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조련사의 ‘손짓’에 의해 날아드는 새처럼, 타인이 내뱉은 날숨을 기꺼이 들이마시려는 몸짓에 의해 지나간
삶의 순간들은 치장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우리 앞에 존재할 수 있다. 권하윤이 제시하는 상상과 모순의
내러티브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몸짓이 불러들이는 불투명한 삶의 기억들을 끊임없이 탈바꿈시켜 지속적으로 역사가 ‘되쓰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꾼다.
1. 밀란 쿤데라, 『불멸』, 김병욱 옮김(서울: 민음사, 2010),
487. 필자는 2019년 권하윤을 포함한 6인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불멸사랑》(2019.2.22–5.12, 일민미술관)을 기획한 바 있다. 이 글은 당시 전시 기획 과정에서 동시대 미술이
역사를 다룰 때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며 작가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MMCA 《올해의 작가상 2024》에 출품되는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2024) 및 3점의 대표작 〈증거부족〉(2011), 〈모델 빌리지〉 (2014), 〈489년〉(2016)을 분석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상섭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05), 39.
3. 김지훈, 「산책의 경험과 디지털: 개념주의,
리믹스, 3D 애니메이션」, 『평평한 세계들을
껴안기: 수천개의 작은 미래들로 본 예술의 조건』,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현실문화A,
2018), 101–102.
4. 도나 J. 해러웨이,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민경숙 옮김(서울: 갈무리, 2007), 76.
5. 해러웨이가
‘겸손한 목격자’를 어떻게 재형상화하는지에 대해서는, 김애령, 「사이보그와
그 자매들: 해러웨이의 포스트휴먼 수사 전략」, 『한국여성철학』 제21권(2014): 74–76 참조.
6. 김남시, 「트위터와 새로운 문자소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개념을
중심으로」, 『기호학 연구』 제30권(2011): 12.
7. 김남시, 13.
8. 김지훈, 105.
9. 권하윤, 《불멸사랑》전 작가 인터뷰(2019. 4.).
10.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민아 옮김 (파주: 디플롯: 2021), 258.
11. 김기수, 「‘1989년 이후 컨템포러리
아트’에서 ‘동시대성’의 문제」, 『현대미술학 논문집』, 21집(2017): 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