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람은 뇌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 물론 모르는 걸 보는 것도 아는 것의 일종이다. 몰라서 알고 싶고 그래서 알게 된다. 여기서 ‘가치관(價値觀, value system)’은 뇌가 작동하는 중요한 무대다. 이는 곧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다’라는 식의 세상을 보는 방식, 즉 ‘생각의 관성’이다. 이를테면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혹은, 이런 과정이 옳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점차 양식(pattern)의 분류와 구조화가 뒤따른다.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은 ‘가치관’을 형성하는 특별한 관점으로서, ‘내 앎’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알고리즘이다. 여기서 나는 역사적 철학 사조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즉 일종의 ‘인식의 틀’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존재론(存在論, Ontology)’ 또한 관심사와 사고 진행 과정을 ‘인식론’의 구조로 설명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광의의 ‘인식론’은 그동안 무척이나 다양하게 분화해왔다.
비유컨대, ‘가치관’과 ‘인식론’은 하나로 버무려진 ‘세상을 보는 색안경’이다. 예를 들어 사과가 네모로 보이는 ‘색안경’을 쓴다. 시든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색안경’을 쓴다. 혹은, 아예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여러 ‘색안경’을 돌려쓰며 관찰한다. 그래, 작가로서 다양한 ‘색안경’을 구비하고 활용하기란 참으로 매력적이다. 특히, 내가 선호하는 ‘색안경’은 ‘관계성 중점 렌즈’다. 이를테면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보이는 사뭇 다른 풍경이 서로 묘한 관련을 맺는다.
1.2
나는 ‘실재 세계’와 ‘실제 세상’의 관계에 주목한다. ‘실재 세계’는 내 밖에 존재하고, ‘실제 세상’은 내 안에 현상한다. 즉, 전자는 ‘물질적 사실’이고 후자는 ‘정신적 인식’이다. 예를 들어 전자의 경우, 63빌딩은 완공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 63빌딩은 한때 기세 등등했으나 이제는 사뭇 노쇠했다. 비유컨대, 나는 전자에 살고 후자를 산다. 혹은, 전자는 내 재료, 후자는 내 그림.
이와 관련된 전통적인 두 갈래의 ‘인식론’, 다음과 같다. 첫째,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에 따르면, ‘실재 세계’가 근본이다. 여기서는 ‘세계–몸–마음’의 순서로 세계가 내게로 향한다. 예컨대,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세상이 시원하다.” 이는 지구가 내게 건네는 추상 몸짓이다. 즉, 바람이 불면 우선 내 몸이, 그리고 내 마음이 이어 반응한다. 물론 내 머리카락이 휘날린다고 해서 막상 세계 자체가 시원한 건 아니다. 당장 내 마음이 시원할 뿐. 허나 내 마음이 세상이다.
여기서 머리카락은 비유다. 사실상, 주변을 휘감는 바람을 표상하는 매체는 다양하다. 예컨대, 나뭇가지에 이파리가 살랑거린다. 깃대에 깃발이 펄럭인다, 내 몸에 옷깃이 치댄다, 피부의 수분이 날아간다. 혹은, 건물 외벽에 튕긴다. 물론 바람의 영향권 바깥에 태양은 그저 무심할 뿐.
둘째, ‘관념론(觀念論, Idealism)’에 따르면, ‘실제 세상’이 근본이다. 여기서는 ‘마음–몸–세계’의 순서로 내가 세계로 향한다. 예컨대, “세상이 시원하다. 머리카락을 휘두른다. 바람이 분다.” 이는 내가 지구에 건네는 추상 몸짓이다. 즉, 시원한 세계를 바라는 마음에 내 몸을 움직인다. 비로소 바람이 분다. 물론 내 머리카락을 휘두른다고 해서 바로 세계가 시원해지진 않는다.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품는다. 어느덧 세상이 세계가 되듯이.
여기서 머리카락은 비유다. 사실상 “세상이 시원하다”라는 식의 내 마음속 쾌감을 실현하는 매체는 다양하다. 예컨대, 회화는 붓으로 물감을 쓸어 화면에 구성한다. 사진은 카메라로 풍경을 찍어 화면에 구성한다. 음악은 악기로 소리를 내어 무대를 연출한다. 무용은 몸으로 동작을 이어 무대를 연출한다. 소설은 글로 사건을 보여 서사를 생성한다. 시민운동가는 뜻으로 행동을 보여 의식을 변화한다.
1.3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응하여 내가 주목하는 또 다른 두 갈래의 ‘인식론’,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이라서 둘 다 맞다. ‘관계론(關係論, Relationism)’에 따르면, ‘실재 세계’와 ‘실제 세상’은 다분히 순환적인 관계다. 여기서는 물질의 관점으로 본다면 ‘세계–몸–마음’의 순서로, 그리고 정신의 관점으로 본다면 ‘마음–몸–세계’의 순서로 해석의 방향을 설정한다. 비유컨대, 자르는 방향이 달라도 여전히 사과는 사과일 뿐이다. 즉, 이론적으로는 어떤 방향도 가능하며, 나아가 서로를 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특정 작업을 진행할 때, 보편적으로 당연하거나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향은 보통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주변의 도시나 자연, 사람을 촬영한 ‘구상 풍경 사진’은 물리적인 시공에서 내 눈으로 관찰하는 ‘실재 세계’의 가중치가 높다. 반면에 물감의 형태, 색채, 질감을 활용한 ‘추상 붓질 회화’는 내 내면을 음미하는 ‘실제 세상’의 가중치가 높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보통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보다는 그러고 싶은 ‘지향성’의 힘이 크다. 따라서 같은 분야라 할지라도 나만의 의도나 감각에 따라 막상 전개되는 방식은 종종 달라지게 마련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1인칭 주어’가 중요하다. ‘구성론(構成論, Constructivism)’에 따르면, 결국 의미는 인식하기 나름이다. 여기서는 인식 주체를 중시하는 ‘현상론(現象論, Phenomenology)’에 입각한 ‘사적인 의미’, 그리고 전체 맥락을 중시하는 ‘해석론(解釋論, Hermeneutics)’에 입각한 ‘공적인 의미’에 모두 가중치를 둔다.
우선, ‘사적인 의미’에서 주어는 ‘나’다. 앞에 언급된 ‘유물론’의 예,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세상이 시원하다.”의 경우, 개인적으로 내가 시원한 마음을 누리려면, “아름다운 밤이에요”와 같은 긍정의 힘과 준비된 자세, 즉 사는 데 생산적인 ‘예술적 승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바람 앞에서도 누군가의 세상은 전혀 시원하지 않다. 결국, 다중우주로의 길목에서 내 우주를 결정하는 관문은 바로 스스로 ‘마음먹기’다.
다음, ‘공적인 의미’에서 주어는 ‘우리’다. 앞에 언급된 ‘관념론’의 예, “세상이 시원하다. 머리카락을 휘두른다. 바람이 분다.”의 경우, 사회문화적으로 내가 모종의 영향을 미치려면, 제작과 배포의 개별적인 노고와 더불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예술적 공감’이 필요하다. 물론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중시하지 않으면 역사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결국, 다양한 담론을 무한 확장하는 토양은 바로 우리들의 ‘다층적인 맥락’이다.
2.1
나는 ‘사진 프로젝트’와 ‘회화 프로젝트’에 주목하여 사진과 회화로 바라본 일종의 ‘인식의 풍경’을 구축한다. 결국, 둘 다 ‘추상 몸짓’이다. 이는 기왕이면 보다 나은 서로의 기운을 통하고자 세계와 세상이 ‘교류하는 신호’다. 때로는 “사랑해”라는 직접적인 ‘언어’ 표현보다 그저 아무 말 없는 ‘행동’이나 눈짓, 손짓, 발짓과 같은 여러 ‘몸짓’이 더 효과적이다. 물론 이와 같은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은 막상 감정과 근육으로 느껴야 비로소 체감하지, 말로는 종종 설명하기 난감하다.
조형적으로 ‘구상’이 ‘물리적인 세계’의 재현이라면, ‘추상’은 ‘초월적인 정신’의 표현이다. 따라서 ‘추상’은 당장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는 노력이다. 그리고 ‘몸짓’은 이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시도다. 예컨대, 무언가를 ‘언어’로 설명할 때, 여러 ‘몸짓’은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편이다. 물론 ‘관념의 시각화’로서 ‘언어’와 ‘몸짓’은 둘 다 질적 평가의 대상이다. 즉, 당연하고 뻔하기보다는, 참신하고 뜻깊어야 비로소 예술적인 진가를 발휘한다.
나는 사진과 회화를 통해 나와 우리에게 힘이 되는 ‘유익한 기운’을 잘 드러내고 싶다. 이를테면 사진에서는 눈앞의 풍경이 자기장처럼 더욱 뻗어 나가거나 끌어들이는 ‘주목의 기운’을 생성한다. 그리고 회화에서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듯이 얽히고설키며 기운이 모이거나, 바람이 불듯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조화의 기운’을 생성한다. 나아가, 사진과 회화 모두 특정 시공을 초월하여 다양한 요소들이 화합하거나 충돌하고 긴장하며 여러 관계를 파생하는 ‘맥락의 기운’을 마련한다.
2.2
사진과 회화는 내가 예술을 하는 방편적인 도구다. 물론 겉모습을 보면, 사진은 구상화, 회화는 추상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작업을 진행하는 자세는 나름 일관된다. 이를테면 애초의 자극이 기계적 광학 장치로 촬영된 구상적인 ‘세계의 잔상’이건, 혹은 기술적 작업 도구로 초래된 추상적인 ‘물감의 자국’이건, 내게는 모두 나만의 특별한 ‘인식의 풍경’을 구축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 가능한 예술적인 재료다.
공통적으로, 내 사진과 회화의 대표적인 전략 세 가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각 재료를 모으는 경우, ‘집적’과 ’축적’의 방식을 활용하는 ‘수집(collection)’이다. 우선, 사진은 한 번에 전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을 찍어 전체를 구축한다. 이를테면 다양한 각도로 한 장소를 부분 촬영하여 이어 붙인다.
혹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촬영된 건물, 파도, 사람 이미지를 마치 공연장으로 초대하듯이 한 장면에 왕창 모은다. 다음, 회화는 여러 획을 집적하거나 하나의 획의 모양에 수많은 획을 축적한다. 이를테면 여러 획들을 사방으로 구성하며 조화나 긴장을 유발한다. 혹은, 한 획을 수많은 획으로 덧칠하며 마치 근육선을 다듬듯이 점차 강화한다.
둘째, 시각 재료를 다듬는 경우, ‘다층’과 ‘혼합’의 방식을 활용하는 ‘수정(retouching)’이다. 이를테면 사진에 낯선 회화적 질감 이미지를 레이어 블렌딩(layer blending) 기법으로 덧입히거나, 회화에 다른 색채를 글레이징(glazing) 기법으로 덧칠하며 화면 전체의 조화와 깊이감을 강화한다. 그러고 나면 새롭게 생성된 풍경이지만 원래부터 당연히 그런 방식으로 존재했을 법한, 소위 그럼직한(plausible) ‘예술적 정당성’이 확보된다. 즉, 전체적으로 어울리며 말이 된다. 이는 부분의 합이 또 다른 전체를 형성하는 ‘게슈탈트(Gestalt) 이론’과도 통한다.
셋째, 시각 재료를 모으고 다듬는 전체 과정의 경우, 미리 구체적인 완성 이미지를 상정하지 않고 작업을 진행하기에 종종 막연하니 애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확신’에 힘을 입은 ‘각성(awakening)’이다. 즉, 나를 믿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몸이 가는 대로 일하면, 궁극에는 ‘좋은 작업’이 완성된다. 이를테면 사진 한 장을 찍을 때, 혹은 회화 한 획을 그릴 때, 아직 정확한 전체의 모양은 없다. 그저 내 기질과 상상력, 그리고 노력을 존중하며, 앞으로 ‘잠재적 가능성’이 충만한 ‘희망의 씨앗’을 뿌릴 뿐.
내 사진과 회화는 모두 ‘내 마음의 스크린’에서 여러 재료를 새롭게 조합하는 ‘예술적인 몸짓’이다. 마치 한 개체가 태어나 성장과 발달을 경험하듯이, 그저 작업 과정에 충실하니 점차 해당 작업마다 각자의 길이 펼쳐진다. 그러나 마치 ‘확률적 예측’의 진행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보증하지는 않듯이, 마침내 ‘도달한 결괏값’은 모든 우연과 필연이 버무려지며 귀결된 수많은 길 중에 하나다.
그렇다면 개별 작품은 마치 한 경기가 보여주는 삶의 드라마인 양, 소위 한 생명의 삶이 특정 우주에서 집약된 결정체다. 그리고 여러 작품이 모인 전시장은 바로 ‘다중우주’다.
결국, 이 모든 건 궁극에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통상적인 기업 경영의 관점으로 다소 이는 위험한 결정이다. 전체적인 청사진과 구체적인 예측이 부재한 즉흥적인 투자라면 막상 문제가 생기면 대책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진정한 ‘사람다움’에 충실한 개별자, 즉 차별화된 ‘개인 작가’로서 내 인생, 내가 산다.
만약에 ‘물질과 정신’을 ‘운명과 의지’의 줄다리기로 본다면, ‘나는 나야’라는 식의 이와 같은 ‘자의식’ 과잉 상태를 나는 선호한다. 이를테면 “되면 완성작, 안 되면 말고.” 이는 결과보다는 과정, 그리고 성과보다는 유희를 중시하는 여유로운 태도다. 비유컨대, 같은 노래를 불러도 매번 다르다. 바로 그게 녹음된 노래와는 달리, 때에 따라 변수로 충만한 살아있는 ‘사람의 맛’이다.
2.3
사진과 회화는 미디어의 특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내 관심사도 다르다. 우선, 내 사진의 토대는 보이는 것, 즉 있는 것을 다르게 보는 ‘다시 보기(re-view)’의 미학이다. 이를테면 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구체적인 시공이 특정되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내가 구축한 전체 풍경은 새로운 눈으로 같은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고 표현했기에 마냥 증거물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의 ‘실재 세계’를 바탕으로 내 ‘실제 세상’에 생생하게 구체화된 풍경을 음미하는 ‘인식의 몸짓’이다. 예컨대, 여행 중에 눈앞의 풍경을 음미하며 갈무리한, 마치 증강현실처럼 증폭되고 변주되는 ‘극대주의(Maximalism)’적인 표현이다.
다음 내 회화의 토대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없는 것을 뚜렷이 보는 ‘보기 이전(preview)’의 미학이다. 이를테면 내가 그린 하나의 붓질은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미정인 ‘X 함수’다. 그러나 내가 조직한 전체 풍경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예술담론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하기에 마냥 부재하진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실재 세계’를 초월하여 내 ‘실제 세상’에 잠재적으로 보편화된 풍경을 음미하는 ‘인식의 몸짓’이다. 예컨대, 명상 중에 내면 풍경을 음미하며 갈무리한, 마치 ‘유형학(typology)’처럼 뭐든지 대입되는 기본 구조만 제시되는 ‘극소주의(Minimalism)’적인 표현이다.
“과연 무엇을 보고 살까?” 사람이라면 기왕 좋은 걸 보고 싶다. 방식은 다르지만, 내 사진과 회화는 모두 예술적인 ‘보기(view)’에 주목한다. 물론 ‘본다’는 행위에는 모종의 책임이 따른다. 동시에 이는 ‘내 삶의 자양분’이다. 이를테면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바라보면 뭐든지 온갖 종류의 ‘몸짓’으로 충만하다. 예컨대, ‘의인화의 마법’을 감행하니 갑자기 주변에 온갖 사물이 너스레를 떤다.
“과연 어떻게 하고 살까?” 사람이라면 기왕 좋은 걸 하고 싶다. ‘좋은 작가’는 개중에 더 가치로운 몸짓을 온몸과 마음으로 발굴하고 주목하며, 장착하고 활용하며, 숙성하고 파생한다. 부디 내 작품이 ‘좋은 몸짓’의 터전이 되기를. 옛일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서처럼 누군가에게 ‘좋은 기운’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로 인해 나도 모르게 통하게 마련이다.
예술은 도덕과 관련 지을 수 있으나, 서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솔직히 누구나 그렇듯이, 그동안 내가 부족하여 벌어진 실수와 잘못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적으로, 우리는 각자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 ‘무대’를 통해 누구나 누군가를 감동시킬 능력이 있다. 결국, ‘사람적 진정’과 ‘우주적 진실’이 묘하게도 합을 맞추면, 비로소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이 된다. 작가로서 나 또한 꾸준한 작업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눈물을 숙성한다. 그리고 무언가와 연결된다. 드디어 개봉 박두, 사진과 회화로 표현된 ‘추상 몸짓’을 산책한다.
‘추상 몸짓’은 각자의 삶에 투영되는 ‘음양 법칙 세계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색안경’이다. 이를테면 희망과 불안, 욕망과 좌절, 풍요와 공허, 화합과 긴장 등, 아이러니한 ‘양가적 대립항’의 관계에 주목한다. 마치 ‘음양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듯이, 애초에 세상의 재료나 우리의 시선은 평등하다. 예컨대, 햇빛과 그늘은 사실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햇빛과 마찬가지로 그늘 또한 함께 하면 ‘참 좋은 친구’다.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 뭐든지 제대로 활용하는 ‘예술하기’의 능력이다.
부디 예술적 고민으로 추출한 내 ‘몸짓’이 나름의 방식으로 나와 세상에 고양된 조명을 비추는 원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그동안 카메라를 들고 ‘극대주의’적으로 꽉 찬 세상을 보며, 혹은 붓을 들고 ‘극소주의’적으로 텅 빈 캔버스를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은유적, 연상적, 확률적 상상력’에 여기저기 소요하며 몰두했다. 그래, 부단히도 세상은 나를, 그리고 나는 세상을 밀고 당긴다.
결국, ‘추상 몸짓’은 당장 세상이 내게, 그리고 내가 세상에 건네는 ‘소통의 몸짓’이다. 다음, 작가로서 우리 모두에게 절절히 바라는 ‘희망의 몸짓’이다. 이는 환한 낮, 눈앞의 길거리 풍경에서,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에도 목도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예술적인 경험은 참으로 생생하다. 고로 표현한다. 해서 존재한다. 기왕이면 이 전시가 내 ‘숙성된 몸짓’을 잘 전달하고, 여러모로 우리 ‘화답의 몸짓’이 서로 어울리며, 그래서 세상 ‘풍요의 몸짓’으로 풍성한 예술담론에 일조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