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재, 〈SHOW ROOM I〉, 2018, 잉크젯 프린트, 50 x 50 cm © 조경재

1. 작가 조경재는 공간에 공간을 덧댄다. 각각의 공간에 놓여 있던 사물로 또 다른 공간을 생성하곤 이를 카메라로 옮긴다. 이는 일종의 구성 행위이자 ‘조각적 구조물’이라는 결과로써,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카메라의 제한된 화각 안에 실제 공간을 추상 회화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고 이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은 특별한 게 아니다. 카펫, 벽돌, 나무, 쇠파이프, 스티로폼, 철판 등, 우리 주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들이자 대량생산된 것들이다. 어쩌면 도시문명의 흔적들이며 버려진 것들이고, 기존 기능에서 이탈한 것들이다. 작가는 이 사물들로 비인위적이면서 의도가 거세된 재현을 선보인다.

물론 비인위적 재현은 다른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흔하다. 일례로 토마스 허쉬온(Thomas Hirschhorn)의 일부 작업에서 역시 버려진 제품들을 이용한 조각적 구조물을 엿볼 수 있고,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다만 각 사물이 하나의 색이 되고 행위의 흔적이 되며 익숙함의 낯선 환기일 수 있는 조경재와는 달리 그는 전쟁, 성, 폭력, 정치적 불안과 관련한 동시대적 이슈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작가의 의도를 억누르는 조경재와는 다르게 허쉬혼의 작업은 반이상적이며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임을 명료히 암시한다.

조경재 작업의 특징은 버려진 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일단 그의 설치는 사진작업의 연장이며, 사진의 확장에 속한다. 그러나 3차원의 세계와 2차원의 세계가 교차한다는 점에서 그 경계는 무의미하다. 해석의 여지도 단일 분야에 귀속되지 않는다. 더불어 그의 작업은 작가의 제시에 의한 관람객의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감각적-행위적으로 반응할 때 빚어지는 ‘해석의 확장’을 중시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매체 간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과 항상 개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사진을 포함한 설치는 오브제와 오브제, 공간과 공간이 일정한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희석된 경계성을 유지할뿐더러, 해체, 조합과 제시라는 과정을 거친 결말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잔존하는 건 미술의 언어로 다층적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 가담하고 자신의 의도를 넘어 대규모로 확장되는-우연한 상황의 견지에 있다.


2. 조경재 작업의 밑바탕은 ‘보다’에 대한 계산되지 않은 영역이다. 본다는 것이 의식의 영역이 아닌 무의식의 영역인 것은 보다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반향 또한 무의식적이다.(숨을 쉴 때 누구도 의식적으로 쉬진 않듯, 아마도 숨을 의식적으로 쉰다면 그야말로 숨 막혀 죽을 것이다) 작가는 이를 백그라운드로 지평을 넓히고, 행동하게 하며 어떤 (각자)나름의 명제를 도출시키는 데 방점을 둔다. 그리고 그 각각의 명제들이 파장이 되어 다른 세상(전혀 생소하거나 익히 알지 못했던)으로 귀착하는 것, 그에겐 이런 것들이 의미 있는 요소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작품은 정해진 것이 없다. 전시장 역시 같은 범주에 든다. 그것은 하나의 쇼룸이 아닌 작품자체로써, 해체와 조합에 의한 ‘우연’이 부유할 뿐, 설정은 최소화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업들은 어느 정도의 조형적 설정은 동반하지만, 주제나 관람 방법에 대한 지침은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진 작품 〈WT004〉에서처럼 공간과 카메라 사이엔 시각적 위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형성을 배척한다. 그는 “사진 촬영 작업을 하면서 오브제를 마음대로 조합했듯이 관람자도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 조형들을 자유롭게 재조합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은 2017년 진행된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의 전시 《부서진 모서리》 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벽돌과 나무판자, 공간을 가로지르는 설치가 뒤섞인 구성이 설치와 사진으로 치환된 전시가 관객 경험을 통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해당 전시는 'Collage' 연작을 비롯해, 〈Sadari 004〉(2015), 〈푸른 치즈〉(2017), 〈계단02〉(2015) 등의 작품으로 재현됐다.

이 사물들은 서로 간 균형을 유지한 채 유동적인 상황을 보여주었고, 이는 조경재의 작품에 대해 모 기획자가 언급한 “사진에서 설치로 확장하면서, 각각의 장르 안에서 인식되는 시지각적 요소들을 조작하거나 연결하고, 조합하거나 해체하여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다른 표현방식으로 공간 안에 중첩된 상황”을 드러냈다.

2018년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진행된 《치수를 드러내다》 전에서의 〈SHOW ROOM〉(2018), 〈Drum〉(2013), 〈의자〉(2012) 등도 매한가지다. 작가에 따르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불안과 긴장이라는 공간적 특징을 모티브로 하였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즉흥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안에서 밖으로, 다시 역으로 휘도는 사물과 사진은 종잡을 수 없는 모양새를 띠었으며 자유로운 방향을 지녔다.

프랑스에서 열린 《변형된 공간》(Un espace transformé)(2018) 역시 대동소이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사진을 거는 지지대의 선은 사진 속의 선들과 교차하며 2차원과 3차원을 잇는다. 사진평면과 그것이 놓인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는 이러한 성취는 감상의 질을 바뀌 놓는다. 설치적 사진에서의 감상이 정면적이고 시각적인 것이었다면 사진적 설치에서의 그것은 다면적이고 신체적이다. 공간 속을 움직이는 관객의 시점이 변화함에 따라 지각되는 광경이 끊임없이 바뀌는 공간적이고 현상학적인 체험인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또한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순간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기존 공간 내에서의 다양한 오브제들은 비정형의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관객들로 인해 또 다른 공간으로 무한 증식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들이 사용하는 SNS는 증식의 새로운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관람객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이 달라짐으로 인한 ‘반응’과 의도되지 않은 전개는 조경재가 바라는 궁극의 결말이다. 즉, 애초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적이되, 긴장과 이완의 작용을 시각으로 이끌어내면서 새로운 세계를 도출하는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조경재, 〈SY001〉, 2019, 잉크젯 프린트, 120 x 120 cm © 조경재

​3. 조경재의 작업은 단순히 사진과 설치로 구분 지을 수가 없다. 그것은 조형공간을 생성하기 위한 것이지 사진과 설치라는 분야와는 사실상 큰 상관이 없다.(설사 있다 해도 필자에겐 그리 다가오지 않는다)

그 보단 같은 시간 내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 우리와 시간성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각자 고유의 시간성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타인들과 공유하며 공존하는 다양한 방식에 가깝다. 서로 다른 무언가가 이질성 없이 연속적 관계 맺음을 통해 다른 차원의 의사소통과 형식 및 내용을 형성하고, 관람객 각자의 내면에 들어서는 예술로 위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경재의 작업에선 그 자체로 이전과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과 설치를 넘어 예술 주체의 양도현상을 비롯해 타자의 개입, 다양한 스토리가 내재된 각기 다른 군도의 공존적 집합을 통한 인과성의 내러티브(narrative)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선 설치적 사진이나 사진적 설치라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의사소통의 방식과 이미지 생산 및 소비 패러다임의 혼재에 무게를 두는데다, 시각의 개별적 수용과 그 수용을 거름망으로 한 발화에 방점을 둔다. 그의 이런 양상은 공동 작업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독일에서 2009년부터 시작한 공동 작업은 한국생활에 적응 중인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실제 접한 작품은 11월 6일 JCC미술관에서 진행되는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 전에 선보일 작품의 일부일 뿐이지만, 작가가 소개한 그의 홈페이지엔 다양한 공동 작업이 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몇몇 작업은 제목이 심어주는 인상보다 재미있다.

예를 들어 본격적인 공동작업의 계기가 된 〈Artist for sale〉(작가를 팔다니!)은 말 그대로 작가를 경매로 판매하는 작업이다. 통상 작품을 경매하는 것에 반해 아티스트를 소비체로 설정했다는 점, 도구로써의 작가가 의미하는 것이 단순한 거래가 아닌,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술이 획득할 수 있는 가치가 소장 불가능한 작품이기에 결국 남는 건 컨셉(concept)이다.

이밖에도 각 나라 마다의 억양의 차이를 이용한 리듬감 있는 전자목소리를 작업의 부분으로 활용한 사운드 전시 〈Ruffy Puppy Muppy〉나, 관람객이 주어진 동전으로 벽면을 복권처럼 긁어 스마일 마크를 찾으면 768,59유로(약 100만원)를 지급한 〈einer Gewinnt〉 등도 눈에 띈다.

하나같이 이벤트적인 요소가 배어 있으나, 예술과 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지만 상황과 반응을 통한 사고지평의 확장은 예술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그것과는 별개의 지류를 만든다. 이는 어쩌면 얼터 모던(alter modern)의 한 흔적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예술에 있어 시도되어 온 대안 지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특히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 전에 선보일 팀과 동명의 작품 〈Happy Hour〉는 퍼포먼스 전시로, 관람객과 전문 퍼포머 간 행위에 초점을 맞춘 작업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은 없으나 이미지만으로도 공간, 사람, 시간이 어우러진 다면적 프로덕션임을 알 수 있다.

이 작업 역시 행위에 가담하는 관객들을 포함한 상황자체를 다룬다. 예술장르와 분야가 구분되어 지지 않은 채 복합적으로 끊임없이 그리드(GRED)되거나 침범되고 결합되며 융합 및 혼종을 호출하는 동시대미술의 한 경향을 읽게 한다는 점에선 앞선 공동 작업과 결이 유사하다.


조경재, 〈SY002〉, 2019, 잉크젯 프린트, 120 x 120 cm © 조경재

4. 조경재의 공동 작업은 예술의 의미를 재정의하기 위한 실험의 과정으로 이해 가능하다. 일종의 만남의 장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선 프랑스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말한 ‘관계 미학’의 예술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소위 ‘오프닝에서 스프를 서빙하는 예술가’까진 아니더라도, 물론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로 예술과 예술, 사람과 사람,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사회와 예술이 다층적으로 결합하고 해체되어 다시 산파되는 구조를 하고 있는 탓이다.

물론 완성도와 만족도는 가늠할 수 없지만 생각과 행동이 곧 예술적 파장을, 어떤 경우엔 미적 태도로 인한 파급이 새롭게 잉태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공간과 작품, 예술가와 관람객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맥락에 위치시켜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치 있는 건 관람객이 느낄 개별적이고 고유한 경험이다. 한시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제시된 틀에서 각자의 기억에 남을 우연성에 기댄 필연성, 그 관계망에 대한 탐구이다.

조경재의 공동 작업은 미리 정의내리지 않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황에서 마주하는 미완의 과정이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물리적 것과 비물리적인 것의 경계를 무기력하게 하고 선을 넘나드는 탈경계화 속에서 연속적 관계맺음을 통해 익숙함을 저버리는 예술의 소통방식과 내용, 형식을 담보한다. 그러고 보면 기존 개인작업과 공동 작업이 아예 다른 길은 아니다.

특히 이전과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은 그의 작업에서 목도할 수 있는 의미에 해당한다. 여기엔 교조주의의 탈구축과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왕래, 새로운 영역확장, 새로운 가능성 모색 등과 같은 정신적, 물리적, 관념적 여정과 맞물린 모든 상태가 녹아 있다.

다만 커뮤니티의 변화와 맞물린 조경재의 작업이 포스트 프로덕션(post production), 즉 모든 준비가 끝난 상황에 이어진 완성이 어느 선에서 도출될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여전히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그의 실험이 올곧이 완성되길 바라지만 결과야 어떠하든 지금 이 순간, 그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필자의 이러한 ‘반응’ 또한 그의 목록화의 체계 속에 들어갈지 모른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