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Ⅰ〉, 2019, 단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30분 34초 © 무진형제

무진형제는 그네들이 몸담은 현실의 주변부에서부터 얘기를 건네왔다. 그 이야기는 장소의 주변부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초점이 맞춰지곤 했다. 주변부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진 어느 장소, 혹은 어느 옛이야기로부터 촉발되어 온 무진형제의 작업은 허구적 서사로 현실의 내부에 잠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먼 시간을 거스르는 구전에서 현실을 발굴하기도 한다.

이들의 얘기는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이를 재현하기보다는 픽션의 요소를 통해 그 이야기가 품은 공간의 폭을 바깥세상으로 힘껏 밀어내왔다. 무진형제는 장소와 인간의 관계, 삶의 근원적 질문, 주변부에 남겨진 삶, 획일적 가치에 맞서는 사유, 픽션을 통한 현실의 확장 등과 같은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이를 조직하는 세부적인 서사를 매번의 작업에서 실험해왔다.

무엇보다도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 내부와 외부, 이곳과 저곳 등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되어 보이는 영역을 은폐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 공백에 귀를 기울이도록 한다. 그렇게 이들은 가까이에서도, 멀리에서도 쉼 없는 얘기꾼과 같이 이야기를 전해 왔다. 정보가 앞서나가고 경험이 희박해져가는 시대를 예측한 벤야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전하는 자로서 ‘얘기꾼(storyteller)’의 존재를 강조한 적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무진형제를 얘기꾼이라 칭하며,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작가가 직조하는 삶의 이야기와 시청각적 언어에 주목하여 이번의 전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를 다루고자 한다.


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Ⅰ〉, 2019, 단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30분 34초 © 무진형제

두 감각 사이에서 : 지팡이와 스케이트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는 무진형제가 다뤄온 장소와 삶의 이야기가 스크린에서의 감각으로 집중된 전시이다. 영상을 주된 매체로 다루면서 문학, 사진, 설치, 조각, 드로잉적 요소가 하나의 스크린을 구성하는 무진형제에게 이번 작업은 스크린의 감각 그 자체, 그들의 말에 의하면 “만들어 제시하기보다는 발견한 것을 영상으로 만드는” 감각으로 집결된다. 서사의 내러티브가 유도하던 기존의 전개 방식에서 떨어져 나와, 언어와 이미지의 부딪힘 그리고 멂의 상태로 관객을 이끄는 방식이다.

이때 이미지는 언어를 재현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도 언어 또한 이미지를 서술하거나 부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미지와 언어를 부단히 병치하거나 인위적으로 엮으려 하지도, 화면 위에 다중의 스크린으로 마냥 펼쳐 놓지도 않는다. 이미지와 언어는 오히려 각각 고유한 성질로 이야기를 건네며 서로 평행하게 자신의 궤적을 이어나간다.

전시에서 작업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집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전시장(아트 스페이스 풀)의 형태를 통과해, 이러한 특징을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블랙박스의 내부로 들어와야 한다. 영상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전시장에 존재하는 물성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렇게 도달한 공간의 적막 속에서 관객의 귀에 닿는 것은 물 흐르는 소리, 지팡이 짚는 소리, 대숲 흔들리는 소리, 노인의 웅얼거림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어느 노인의 하루가 담긴 영상을 마주한다. 카메라는 노인의 피부에 깊게 패인 주름까지도 낱낱이 응시하며, 세부적인 움직임까지도 차분히 잡아낸다. 그의 신체를 근접하여 촬영하는 카메라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떨림마저도 면밀히 담아내나 이에 대한 작가의 판단이나 주장은 최대한 배제된다. 백세를 앞둔 노인의 별 볼 일 없는 하루를 롱테이크와 디테일한 묘사로 담아낼 뿐이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Ⅰ〉에서 30여 분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이란 지팡이에 기대어 세어지는 걸음, 앞마당에서 마을을 응시하는 시선,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밥, 우편 봉투를 여러 번 만지작거리는 손동작 등 하잘것없이 반복되는 소소한 행위들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신체와 내밀히 관계하는 사물(지팡이, 우편 봉투, 약봉지, 전화선 등)과 그가 거주하는 낡은 집의 구석구석(안방, 마루, 마당, 헛간 등)까지도 우리의 시선에 서서히 드러난다. 오래된 집, 집안에 가득한 살림살이, 헛간의 가재도구는 노인이 웅얼거리는 잠꼬대의 시간을 타고 쇠락한 이미지에 깃든 삶의 역사와 숨결을 전한다.


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Ⅱ〉, 2019, 단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19분 1초 © 무진형제

두 세계 사이에서 : 동시대의 빈곤함과 구시대의 촉각성

이러한 감각을 인식하는 것은 사실 두 번째 영상 작업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Ⅱ〉를 보고 나서이다. 기억의 사후작용처럼, 노인의 하루에 담긴 삶의 촉각적 감각은 그다음 세대의 이야기인 그의 자손들에 대한 두 번째 영상을 보고 난 후 보다 분명해진다. 단절되고 불연속적인 삶에 담긴 시차가 두 영상을 모두 보고 난 후에야 뇌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노인이 짚는 지팡이의 또렷하고 느릿느릿한 소리는 아이스링크의 스케이팅에서 들리는 날쌔고 날카로운 소리로 급격히 전환되고, 낡은 집에 누적된 삶의 촉각성은 위성지도를 통한 대지의 이미지, 너무나 평면적이어 빈곤하기까지 한 감각으로 전환된다. 서로를 대조적으로 비추는 두 영상의 감각은 구시대적 촉각성과 동시대의 빈곤한 이미지 사이에 걸쳐진다.

두 번째 영상에서 스크린의 물성이 바뀌듯, 이를 서술하는 언어의 구조 또한 첫 번째 영상과 대조를 이룬다. 첫 번째가 비언어적 서술 방식을 띈다면, 두 번째는 언어와 같이 직조된 서사 구조를 갖는다. 이때 한자를 독해하는 것으로 거주(居住)의 근원적 의미에 접근하는 서술 방식은 상대적으로 현시대에서의 거주가 직면한 불안정한 위상을 반영한다. 노인이 웅얼거리는 잠꼬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삶의 궤적에서 등장한 비언어적 파편과 같다.

노인의 낮잠에서 떠오른 잠꼬대의 파편(실은, 깊은 밤으로부터 낮에 입혀진 소리)은 두 번째 영상에서 거주의 형상을 지배하고 있는 언어, 시스템, 자본, 규범의 영역을 서서히 흩트리기 시작한다.

두 영상에서 언어 구조가 대변하는 시차는 이미지에도 담긴다.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과 인공위성에서 바라본 빼곡하고 평평한 대지가 서로 중첩된 장면은 스케이팅의 날카로운 마찰음을 배경으로 하여 서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스케이트의 칼날이 얼음판을 지나칠수록 속도와 소음은 가중되고, 그 가속의 움직임 속에서 장소라는 것은 더 급속하게 상쇄되어 나간다. 땅과 신체와의 관계는 가속화된 사회 속에서 허물어지고 소거되는 모양새이다.

현시대의 불안정한 거주를 대변하는 평평한 대지는 노인의 거주지와는 상대적으로 물성을 결여한 채로 변형되어 나간다. 거주라는 말을 곱씹을 새도 없이 자본에 의해 계량화되어가는 동시대 터전은 노인의 세계와 반대편에 있다. 동시대는 지팡이 대신 스케이트가, 정주보다는 이동이,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이 지배적인 세계이다. 지팡이와 스케이트, 노인의 피부에 깊게 패인 주름과 아이스링크에 스치는 얇고 날카로운 흠집은 서로 반대편의 물질성을 지향한다.

전자가 신체적이고 경험적인 관계로부터 물질성이라 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물질성에 의해 그 속성이 변형되어 왔다. 서로 멀기만 한 이편과 저편 세상의 사이에서 관객은 ‘딱딱’ 거리는 소리와 ‘휙휙’ 거리는 소리 사이에서 노인의 잠꼬대를 들으며 깊은 적막 속에 남겨진다.


무진형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Ⅱ〉, 2019, 단채널 비디오 설치, 4K,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19분 1초 © 무진형제

시차와 불연속성을 기워내는 얘기꾼으로서 작가

이처럼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에서 대조적으로 자리하는 두 영상은, 거주에 대한 인식을 되짚어 우리 시대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때 시차를 기워내는 작가의 기술(art)은 불연속적인 삶의 이야기를 엮어낼 뿐만 아니라, 장소와 사물 사이에서의 긴밀한 경험이 여전히 존재함을 드러내 보인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언어와 이미지와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세심히 접근된다.

첫 번째 영상은 구시대적인 이미지와 잠꼬대와 같은 ‘파롤’의 세계이며, 두 번째는 규범화된 ‘랑그’로서 장소와 시간이 재배치된 세계이다. 두 작업은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비추며, 노인의 언어화할 수 없는 삶에 담긴 비언어적 감각을 동시대성에 맞서는 시청각적 감각으로 제시한다. 노인의 주름, 먼지가 두둑한 집, 한밤의 잠꼬대가 입혀진 낮잠의 시간, 잠꼬대가 회상하는 삶이 대변하는 것은 개인의 역사와 세상의 흐름에 있어서의 비언어적, 반서사적 존재들의 힘이다.

이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눈에 감지되지 않는 노인의 미세한 손짓과 떨림까지도 화면에 즉물적으로 전하며 디지털 시네마에 근원하는 과거의 시간, 이를 현실로 비유하자면 디지털과 아날로그적 삶 사이에 남겨진 삶의 불연속성을 증언해 보인다.

두 세계 사이, 전진하는 역사와 후진하는 시간 사이에서 배회하는 관객을 안내하는 것은 오래된 사진(1899년의 유리원판필름)이 보내는 반딧불과 같은 신호이다. 작은 틈새에서 빛을 번뜩이는 옛 사진과 함께 구(球)의 먼지들에게서 발견된 별자리 사진은 서로 간에 멀어진 궤적을 잇는 전시장에서의 픽션이다. 불확정적이고 불명료한 세계에 있어 무진형제의 작업은 거대한 시간의 힘에 눌린 주변부의 삶을 널리 펼쳐내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시간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의 시간을 일구어 내길 독려한다.

무진형제는 일전의 한 작가노트에서 “현재의 문제를 긴 호흡으로 숙고하고 곱씹어볼 수 있는 시간”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러한 경험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작가의 예술적 소명이라 한다면, 무진형제에게 주어진 과제는 미학적 성취로서 관객을 감화시키는 것도 정치적 예술로서 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보다는 세계로부터 가려진 “틈새와 주름, 그 안에 새겨진 사소한 표식과 징표”까지도 세심하게 되살리는 시청각적 얘기꾼으로서 삶과 동행하는데 있다. 무진형제의 작업이 세계의 흠집과 주름 사이를 경험하는 적막한 시간에서 나아가, 삶에서 커져가는 세계의 불연속성을 되짚고 이를 사유하는 공동의 자리로 지속되길 바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