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키지(Aokizy)라는 예명으로도 알려진 작가 옥승철(b. 1988)은 원본성과 실재성, 디지털 이미지와 물성을 가진 작품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념들을 탐구해 왔다. 그는 만화, 영화, 게임 등 시각 매체 안에서 끊임없이 복제되고 변주된 디지털 이미지를 원본 삼아,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 매체는 물론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이를 출력하고 생성해 낸다.


옥승철, 〈Matador〉, 2018, 캔버스에 아크릴, 120x120cm ©기체

옥승철의 작업은 컴퓨터 프로그램 내부의 벡터 좌표에서 출발하며,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전통 매체를 통해 자신이 절대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좌표를 현실로 출력한다. 먼저, 작가는 애니메이션과 같은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를 스크린샷(screenshot)한 다음, 이를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옮겨와 재조합한다.
 
이때 그의 작업은 단순한 시점의 변화를 넘어, 이미지의 본질 자체를 조금씩 다르게 그려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마치 게임 속 캐릭터 생성기처럼 머리카락 색이나 피부 톤 등 일부 요소만을 바꾸어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개체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닮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3의 개체들은 작가의 정교한 손길에 따라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 매체로 옮겨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매끄러운 질감과 선명한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아크릴 물감을 여러 차례 덧칠하면서도 붓질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매끄럽게 표면 처리를 한다.


《언 오리지널》 전시 전경(기체, 2018) ©기체

2018년 기체에서 열린 옥승철의 첫 번째 개인전 《언 오리지널》은 작가가 어릴 적 TV, 영화, 잡지 등으로 접했던 80,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재창작한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옥승철은 이러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미지와 더불어, 입시미술의 석고상을 비롯한 자신을 둘러싼 여러 대상의 이미지들을 컴퓨터 상에서 새롭게 조합하며, 자신만의 ‘디지털 원본(vector image)’를 창작하였다.


옥승철, 〈Dealock〉, 2018, 캔버스에 아크릴, 170x170cm ©기체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작업 중 하나인 ‘헬멧’ 연작은 록맨, 독수리 오형제, 사이버 포뮬러, 아이언리거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헬멧에서 시작됐고, ‘플라스터’ 연작은 입시미술의 석고상에 일본 만화의 소녀 이미지들이 갖고 있는 유사성을 상징화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만들어진 벡터 이미지를 다시 회화, 조각, 영상 등 매체의 특성에 기반을 둔 또 다른 원본으로 옮긴다. 이때 가상의 디지털 원본 이미지가 갖는 ‘무한 복제 가능성’과 회화의 ‘유일성’이 부딪히며 모순적인 긴장을 형성하게 된다.


옥승철, 〈Mimic〉, 2018, 캔버스에 아크릴, 120x150cm ©기체

또한 다채로운 감정을 담아내면서도, 배경이 생략된 클로즈업과 면 처리로 서사성을 최소화하고 있는 얼굴들은 그런 긴장을 더욱 증폭시킨다. 옥승철은 클로즈업에 대해 “낯설게 보이도록, 이상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이로 인해, 그의 그림 속에서 얼굴들은 어떠한 서사나 개별성보다 조형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보는 이로 하여금 친숙하면서도 낯선, 언캐니(uncanny)함을 느끼게 한다. 


《JPEG SUPPLY》 전시 전경(기체, 2020) ©기체

나아가, 옥승철은 첫 번째 개인전 《언 오리지널》의 연장선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JPEG SUPPLY》(기체, 2020)를 통해 디지털의 관습과 미술의 관습이 교차하는 작업과정에 주목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디지털 원본의 ‘가벼운 이미지’와 미술 작품의 ‘무거운 이미지’가 교차하는 아이러니를 부각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갤러리 공간은 원본 JPEG에 미술의 전형적 형식과 물리적 형태, 질감을 부여함으로써 예술작품의 요건을 갖추고, 그 고유의 ‘아우라’, ‘차별성’을 감상자에게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설정되었다. 


옥승철, 〈Screenshot〉, 2020, 작가 친필 서명이 포함된 한정판 판화, 50x50cm ©기체

아울러, 인터넷 상을 떠돌며 확산되고 파생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문화를 의미하는 ‘밈(meme)’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집약해 풀어내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밈 이미지가 하나의 형태로 고착되지 않고 공유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변주되듯이, 《JPEG SUPPLY》에서 작가의 디지털 원본 이미지는 회화, 조각 등 예술작품의 전통적 형식부터 굿즈, 앨범, 커스텀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가상,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려 출력되고, 전유된다.


《JPEG SUPPLY》 전시 전경(기체, 2020) ©기체

이를 통해 작가는 이미지가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지 않고 그 안과 밖에서 상호작용하며 여러 형태와 질감으로 구체화되는 과정, 그리고 출력된 외피가 빚어내는 이른바 가벼움과 진지함이 공존하는 모순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디지털과 회화, 원본과 밈의 경계를 허물며, 그 사이에 새로운 관계망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인다.


《트로피》 전시 전경(기체, 2023) ©기체

한편, 2023년 기체에서 열린 개인전 《트로피》에서 옥승철은 원본이 만들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에 더 집중했던 이전 전시들과 달리 도상 그 자체를 다뤘다. 그는 하나의 대상(원본)이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의미 지어지는 것에 주목했다.
 
따라서 전시장에 펼쳐진 작가 특유의 얼굴 도상들은 애초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무한히 열린 채 제시되었다.


《트로피》 전시 전경(기체, 2023) ©기체

그의 작업을 통해 마치 눈부신 기념품처럼 붙잡힌 각각의 이미지들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오가며 수집된 결과물로, 작업 과정 속에서 본연과 다른 정체성을 구축한다. 작가의 주관적 선택이 지속적으로 개입됨에 따라 저마다의 이미지들은 원형에서 점차 멀어지고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
 
세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라쇼몽’ 연작에서 인물은 서로 다른 배경색과 상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작업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같은 상황에 대한 각기 다른 판본의 해석들이다.
 
일관된 윤곽 안에서 눈썹과 눈동자, 입 모양새의 변주에 따라 얼굴이 드러내는 감정은 조금씩 달라진다. 원본의 인물이 본래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트로피》 전시 전경(기체, 2023) ©기체

묵직한 상패를 연상시키는 긴 머리의 두상 이미지를 회화 및 조각의 형태로 변주한 연작 ‘트로피’는 색채의 상징성을 강조하며,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맥락 안에 놓일 수 있는 이미지의 속성을 드러낸다.
 
회화의 화면 위에서 ‘트로피’ 연작은 각각 빛나는 금박, 푸른 청동, 거친 석재를 연상시키는 색채로 표현된다. 크로마키 스크린을 떠올리게 하는 초록 배경은 전시장 벽면 전체까지 확장되어 디지털 시대의 포스트프로덕션에 의한 동시대 이미지의 변주와 차용을 현실의 영역에서 가시화한다.


《프로토타입》 전시 전경(롯데뮤지엄, 2025) ©롯데뮤지엄

이렇듯 옥승철은 이미지가 더 이상 고정된 ‘원본’으로 작동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계열적으로 파생되며 소멸과 재생성을 반복하는지 탐구해 왔다. 앞서 살펴보았듯 최근의 작업에서 그는 고정되지 않은 실체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되어가는’ 감각의 조건을 사유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개인전 《프로토타입》(롯데뮤지엄, 2025)은 디지털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서 이미지가 감각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묻는다. 옥승철은 복제, 유통, 삭제, 변형을 반복하며 감각의 흐름을 재구성하는 오늘날 이미지 환경의 구조를 회화와 입체 작업을 통해 탐색한다.


《프로토타입》 전시 전경(롯데뮤지엄, 2025) ©롯데뮤지엄

작가는 물리적 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디지털 환경 속 유통 구조에 착안해 전시공간을 전시공간을 소프트웨어 유통 방식인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를 모델로 설계하여 전체 전시장을 하나의 가상 공간으로 연출했다.
 
전시 공간은 가운데 십자 복도를 중심으로 전시명과 같은 ‘프로토타입-1’, ‘프로토타입-2’. ‘프로토타입-3’으로 명명된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각 섹션은 독립된 비선형적 동선을 구축하면서도 십자 복도를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관객이 주체적으로 각기 다른 경로를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하나의 섹션을 관람한 관람객은 다시 시작지점으로 돌아와 다음 경로로 관람을 이어나가며 이미지의 호출, 변형, 유통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디지털 환경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전시의 시작점인 십자 복도의 녹색 조명은 크로마키 초록색을 모티프로 하여,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상징하고 다음 전시 공간으로 ‘로딩’되는 듯한 감각을 시각화해 이후 펼쳐질 세 개의 전시 섹션으로의 진입을 매개한다.


《프로토타입》 전시 전경(롯데뮤지엄, 2025) ©롯데뮤지엄

‘프로토타입-1’ 섹션의 첫 공간에는 대형 조각 신작 〈Prototype〉 세 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작가는 거울과 조명이 조각을 둘러싼 형태로 전체 공간을 가상 현실처럼 연출하며 전시의 출발점으로서 ‘기본값’의 시각적 조건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다음 공간에서는 증명사진을 모티프로 삼아 인물의 정체성과 형태를 탐색하는 ‘ID Picture’ 연작과 거울을 활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시각화한 ‘Outline’ 연작이 이어졌다. 마지막 방에서는 ‘Canon’ 연작 등 고전 석고상을 연상시키는 무채색의 드로잉, 평면 조각, 회화 작품이 등장했다.
 
실존 인물 ‘줄리앙’의 흉상에서 출발해 대리석, 석고상, 회화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변형 흐름은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의 이미지 소비 구조와 겹쳐지며 ‘원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프로토타입》 전시 전경(롯데뮤지엄, 2025) ©롯데뮤지엄

한편, ‘프로토타입-2’ 섹션에서 선보인 ‘Mimic’ 연작은 주변 환경과 타인을 모방하여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자아의 상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늘어나거나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자아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프로토타입-3’ 섹션은 반복을 통해 감각이 무뎌지고, 익숙함이 오히려 불편함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약물의 내성처럼 반복되는 이미지에 무감각해지는 상태를 은유한 회화 신작 〈Tylenol〉, 가공 방식에 따라 맛이 달리지는 녹차처럼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에 주목한 〈Taste of green tea〉, 하나의 상징이 서로 다르게 인식되는 상황을 다룬 〈Under the same mood〉 등은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는 감각이 실은 나열된 습관의 호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옥승철, 〈Tylenol〉, 2025, 캔버스에 아크릴, 80x160cm ©롯데뮤지엄

이렇듯 옥승철은 끊임없이 복제되고 변주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위상과 이를 둘러싼 환경, 그리고 이로 인한 감각과 인식의 경험 등을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서 다뤄 왔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무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이미지와 유일성이 강조되는 회화와 조각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동시대성의 틀 안에서 이미지의 존재성과 그 의미를 재고하게 만든다.

 "나의 작품들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변형되는 샘플링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   (옥승철, 롯데뮤지엄 인터뷰 중) 


옥승철 작가 ©Nobless

옥승철은 중앙대학교 서양화과 학부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프로토타입》(롯데뮤지엄, 서울, 2025), 《란포》(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 상하이, 중국, 2025), 《플라나리아》(파르코 뮤지엄 도쿄, 도쿄, 2024), 《트로피》(기체, 서울, 2023), 《2022 아트선재 프로젝트 #2: 크리에이트 아웃라인즈》(아트선재센터, 서울,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부산모카 플랫폼_미안해요 데이브 유감이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4), 《비뉴턴 유체》(실린더2, 서울, 2024), 《DMZ 전시: 체크포인트》(DMZ 파주, 파주, 2023), 《스파이럴즈, 룹스, 뮤턴츠》(K11, 상하이, 중국, 2023), 《애프터 이펙트》(누크갤러리, 서울, 2022), 《삼각의 영역》(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서울,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옥승철의 작품은 아라리오컬렉션 등의 기관이 소장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