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 Seungcheol, Face, 2023, Installation view in Schema art museum © Schema art museum

이 모두의 시작은 모니터 속 이미지였다. 디지털 이미지가 투영된 복제물이자 원본으로 존재하는 회화, 조각, 영상 작품을 보여주는 옥승철은 꽤 오랫동안 원본성과 실재성, 디지털 이미지와 물성을 가진 작품 사이에 형성되는 관념들을 탐구해왔다. 모니터 안에서 작가가 창작한 이미지를 프린트하듯 캔버스에 옮겨 그렸음에도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Adobe Illustrator) 파일보다 회화 작품이 원본처럼 여겨진다거나, 이미지가 끝없이 소모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그 출처가 불분명해지고 원본의 독창성이 희미해지는 상황은 흥미로운 사고 실험의 단초가 된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된 예술 작품의 유일성, 현존성의 상실과 연결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갖는데, 옥승철은 복제로 인해 원본이 가진 오라(aura)가 사라지는 상황보다는 복제와 편집, 변형이 매우 쉽고 물성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이미지의 원본성에 관한 질문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옥승철은 미술의 역사에서 확고한 오라를 부여받았던 신적 존재와 인간계 너머의 세계,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형상화에 주목했고, 개인전 《JPEG Supply》(2020)에서는 디지털 이미지를 불상처럼 보이도록 물질화하는 〈Golden Spike-AU79〉(2020)와 GIF(Graphics Interexchange Format) 파일로 존재하는 〈AU79〉(2020)를 나란히 발표하기도 했다. 똑같은 금빛이지만, 물질로 존재하는 두상과 오직 디지털 이미지인 두상이 갖는 오라는 차이를 보인다. 작가가 주목한 것 중 하나는 나무 조각이 금(gold)이라는 물질로 뒤덮인 표면을 갖게 되면 물질성을 벗어나 신성시되고 영원성을 갖게 된다는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은 고대 조각상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Head Statue〉(2022)에도 적용되었다. 작가는 원본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떤 이유에서 유지되는지, 원본성과 독창성 그리고 오라는 어떤 과정은 거쳐 소유할 수 있는지 끝없이 실험한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며,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에게 지나칠 수 없는 필연적인 이슈이다. 애초에 미술은 다양한 물질로 비물질적 영역-개념과 정신 등-을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옥승철의 작업은 원본성을 부정하는 태도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원본을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실체”이자 “기호”로 이해하며 그 의미를 끝없이 생성하기 위한 노력에 가깝다. 무엇보다 원본성이 “특수한 시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담론들의 묶음이며, 고정된 정의가 아니라 지향하는 목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로 옥승철의 작품도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이든, 회화나 조각이든 원본성과 독창성을 인정받는다. 사실 “원본성을 향한 신념”은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결코 예술의 공간에서 사라진 적이 없으며” 그와 같은 변신이 그것을 살아남게 했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원본성과 “그것을 지향하는 주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
 
한편 옥승철의 회화는 이미지와 재현에 대한 동시대적 사유를 끌어낸다. 전통적으로 회화에서의 재현은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을 모방하여 환영을 경험시켰다. 그런데 옥승철의 회화는 환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니터 안의 가상 이미지를 그린다. 미미한 빛에도 반응하며 외관이 변하는 현실 세계 속 대상을 그리는 것보다 형태와 색채 모두에서 완벽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입체감을 주지만 평평한 표면을 강조하는 명징한 음영,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처럼 보이는 얼굴은 가상성을 고조시킨다. 덕분에 시선은 환영의 공간에 들어서지 못한 채 미끄러지기를 반복한다. 구체적인 형상이 그려졌음에도 자신이 평면일 뿐이라고 끝없이 폭로하는 회화(환영)이다.

이번 전시 《매끄러운 돌밭 2》 (2023)에 소개된 〈Portrait〉은 “자기 자신임을 증명하는 원본성을 가진 사진이지만 얼굴의 복제물”에 불과한 증명사진의 형식을 토대로 한다.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인물의 목 부분에서 절단된 초상들은 옥승철의 다른 초상들이 그렇듯 도굴당한 불상, 잘린 메두사(Medusa)의 얼굴, 신념을 공표하고 돋보이게 하는 잔혹한 수단인 잘린 머리를 연상시켜 정확히 서술하기 난해한 불편함과 우울함을 전한다. 인물을 한정시키는 단서를 삭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원하는 대로 캡처하고 잘라 저장하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사용과 소유 방식”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크롭(crop)과 편집이 반복되어 원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 이미지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옥승철이 원본성, 재현과 환영, 실재와 가상, 평면성을 논한다는 것은 분명 이미지, 나아가 미술의 정체성을 숙고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물질인 〈Face〉와 가상 이미지인 〈Never Again〉을 동시에, 그러나 일부만 담아내는 거울인 〈Outline〉은 전체를 관망하고 있더라도 이 모두를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작가의 지향 역시 정답을 찾아내는 데에 있지 않음을 은유한다. 심지어 작가의 거울은 불안정한 반사상을 제공한다. 거울은 그렇게 “내부를 외부로 보내고 또 외부를 내부로 보내면서 전체를 하나의 광경으로 만든다.”3) 그리고 이 하나의 광경은 미술의 아포리아(aporia)를 확인시킨다.

전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미술뿐만이 아니다. 거울에 나의 모습이 비치는 순간 〈Outline〉은 자화상과 비슷한 무엇이 되고 작품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나를 보기 위해 필요한 거울은 빛 반사를 통해 앞에 있는 상을 비추기에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고 성찰하게 하는 매개체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Face〉가 얼굴의 전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 오직 거울과 같은 반사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거울을 사용해 한 번 더 이미지를 반사해야 한다. 거울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삶을 절반밖에 볼 수 없다. 초상화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이 가장 잘 모르는 것은 자기의 얼굴이다. 자신을 온전히 지각할 수 없는 인간은 스스로에게조차 일부일 뿐이다.4) 따라서 옥승철의 얼굴들은 그 자체로 인간의 안과 밖에는 모순이 가득하다는 진실을 확인시키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인간의 불가해성은 그렇게 재현된다.


Ok Seungcheol, Outline, 2022, Installation view in Schema art museum © Schema art museum

“만일 사람들이 거울 앞에 있는 나르시스를 상상한다면 유리와 금속의 저항은 그의 시도들에 있어서 하나의 장벽으로 대립하게 된다.” “거울은 그에게 그가 포착하지 못하는 하나의 ‘뒤편 세계’를 가둬 두고 있다. 이 세계란 [이곳에서 나르시스가] 자신을 파악하지 못한 채, 좁힐 수는 있겠지만 뛰어넘을 수는 없는 거짓 간격을 통해 그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이다.”5)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거울은 만질 수도 없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동떨어진 세계이다.

연결된 것 같지만, 고립된 영역이다. 인간은 거울로 자신을 볼 수 있으나 거울상에 손을 맞댄 순간조차 붙잡을 수 없다. 모든 세계를 담아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거울 속의 신비로운 평행 세계는 대상을 불완전하게 반영한다. 자기를 인식하는 도구로서의 거울은 마주한 모든 것을 반영하는 무한이지만 인간이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울상과 매끄러운 표면이기에 수많은 얼굴을 가진 동일자이면서 타자이고, 닮았지만 다른6) 주체와 완벽히 일치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거울은 거리를 만든다. 그것은 하나의 다른 공간, 즉 자아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공간을 만든다.” 거울이 제공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자아의 이미지는 “변형”되거나 “다른 누군가가 된 자아의 모습을 제공한다.” “한 면 위의 ‘실재적인’ 것이 지닌 불완전성을 제시하기 위해 거리와 차이를 이용”하는 거울은 “자아의 타자로의 예측 불가능한” “변신을 제공한다.”7) 거울은 “사물을 하나의 광경으로” 바꾸고, “다시 그 광경을 사물들로” 바꾸며 “나 자신을 타인으로, 타인을 나 자신으로 바꿔 놓는 우주적 마술의 도구이다.”8) 이와 같은 거울의 속성은 설치 각도 때문에 거울 앞의 관객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동시에 〈Never Again〉 속 인물과 눈을 맞추게 되는 상황 덕분에 한층 뚜렷해진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단발의 인물이 관객을 보는 것인지 거울에 비친 관객의 상을 보는 것인지 모호하기에 더욱 그렇다.

실재하는 작품이 아닌데도 글을 쓰는 동안 계속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개인전 《Create Outlines》(2022)의 도록 속 전시 전경 사진에서 작품의 자리를 대신한 파란 색면인데 크로마키(chroma key),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Microsoft Windows)의 치명적 오류 시 등장하는 블루스크린(Blue Screen of Death), 깊은 물 혹은 하늘의 색채 같다. 작가는 자기 작품의 시작이 현존하지 않는 디지털 이미지라는 사실에 근거해 컴퓨터 그래픽 작업 전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영화 촬영에 쓰이는 블루스크린의 색을 입혔다. 벽에 걸리고 좌대 위에 놓인 -〈Head〉(2022)의 배경색과 동일한-파란 색면들은 상이 반사되도록 주석과 납의 혼합액인 텡(tain)을 칠한 거울의 뒷면9)을 닮았다. 이는 무한한 반영체로서 거울이 가진 가능성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그것이 단지 평면일 뿐이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이미지의 이면을, 자신의 내면을 들춰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옥승철에게 모니터는, 캔버스와 스크린 그리고 거울은 “공간 속의 다른 공간,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통로(구멍)와 같다.” 그것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 모두 창작의 동력이 된다. 아주 고요하고 차분하지만 언제든 고정된 이미지와 관념을 흩어버릴 수 있는 이 표면은 너무나 매력적인 여러 겹의 세계이다.

 
1) 본 평론은 전시 《매끄러운 돌밭 2》 (쉐마미술관, 2023.9.1.~2023.10.8.) 도록에 실린 「매끈한 표면, 여러 겹의 세계」를 옮긴 것입니다.
2) 윤난지, 『현대미술의 풍경』, 한길아트, 2012, pp. 65-66.
3) 사빈 멜쉬오르 보네, 『거울의 역사』, 윤진(역), 에코리브르, 2001, p. 123.
4) 사빈 멜쉬오르 보네, 2001, p. 123, p. 287. ; 벵자맹 주아노, 『얼굴,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 신혜연(역), ㈜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14, p. 47.
5) 루이 라벨, 『나르시스의 오류』, 이명곤(역), ㈜하움출판사, 2022, p. 19.
6) 사빈 멜쉬오르 보네, 2001, p. 17.
7) 로지 잭슨, 『환상성』, 서강여성문학연구회(역), ㈜문학동네, 2004, p. 117.
8) 메를로-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역), 도서출판 서광사, 2021, p. 302.
9) 루이 라벨, 2022, p. 18.

References